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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 좋습니다. 올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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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율 방어의 본질은 전 국민의 0.5%쯤 되는 주주 자본가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라는 것이다. 그렇다, 명박이는 국가를 상징하거나 대표하지도 않는데,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우리들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자. 말하지 않으면 오류조차도 없는 세계가 된다. 명박이 스스로도, 조선일보도 믿지 않는 믿음을 어쩌면 촛불을 포함한 우리들은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자. 저 대전제, 즉 명박이가 곧 국가라는 믿음은 사실 자본주의의 폭주 앞에 다시 국가를 불러들이고 싶어하는 욕망이 만들어낸 역설이다. 선거를 통해 명박이까지 불러내고야 만 저 욕망은 촛불들까지 아우르고도 남음이 있다.
* 금융 경제는 현실계 혹은 인간계, 즉 실물 경제와의 연관성을 점점 더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금융 자본은 그 연관성을 잃어버리면 잃어버릴수록 좀 더 자유롭고, 세련되고 촘촘하며, 유동적이다. 유동적이라는 말은 축적과 생산을 중심으로 한 초기 자본주의가 자본 유동성을 생명으로 한 후기 자본주의로 옮아가는 장면을 나름대로 축약한 말이다. 생산과 축적이 아닌, 유동성을 극대화하는 자본주의는 실물 경제가 만들어낸 잉여를 흡수하면서 몸을 불린다. 설사 실물경제가 훼손되는 한이 있더라도 유동성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환율 방어의 본질이 그렇다. * 명박이가 하는 일들이 어이 없고 우습다고 여기저기 짤방 만들고 비웃는 걸 보면, 그져 일상적인 유머로 소비되는 명박이를 통해 명박이 뒤에 꼭꼭 숨어 있는 모리배들과 그들의 범죄가 일상적으로 소비되고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촛불을 들고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진중권의 말은 듣기에는 좋지만, 명박이 또한 일상적인 풍경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명박이가 우습긴 하지만, 계급적 강고함은 단단하기 그지없다. 그건 사실 무시무시한 거다. 그 무시무시함이 나는 저 촛불들과 소시민들에게도 여전히 있다고 본다. 예컨대, 광장에 들어서지 못한 비정규직과 진보 정당들에 대한 촛불의 무관심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도발하지 않아서 다만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철저한 배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시민들은 사실 자신들이 무엇을 얼마나 폭력적으로 배제하고 살아가는지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만국의 대주주들이 단결하는 데에는 별 증오가 없으면서 만국은 커녕 일개 사업장의 비정규직들이 생존권을 위해 모여 굶어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않는 것이 소시민들이다. 나는 본 적이 있나니, 그대들은 그대들이 이빨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믿는 것 뿐이다. 그대들은 고기맛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야만적인 마블링의 맛! * 정말 사무실에서 불타는 구두를 던지고 싶을 정도로 지루하기 그지 없다.
* 이게 뭔가, 하고 계속 계속 생각했는데, 결론이 나왔다. 효율성과 합리성의 구분이 너한테는 없다. 효율적이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조직논리의 정수다. 사실 너는 효율적이면 합리적이라는 생각,조차도 못한다. 걍 효율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을 구분 못하는 것이다. 보고 있으면 거의 모태신앙 수준이다. 그 혼동과 미신이 네 신앙의 비밀이다. 그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부터 나는 무척이나 우울하다. 너를 변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나한테 그런 생각은 적들의 논리다. * 나는 생각하느니, 공부해야 한다고 믿는 편인데, 간만에 생각이라는 걸 덕분에 한다. 어줍잖은 생각은 공부의 열린 가능성을 마모시킨다. 대개, 생각이란 건 사치스럽고 쓸모 없는 것이다. * 의자도 없이 카운터 너머에 쭈그리고 앉아 딸깍 딸깍딸깍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앳된 아르바이트. 그 손가락의 움직임은 수화이고, 저 문자 메시지는 내용과 상관없이 조난신호다.
* 지하철에서 날씨도 서늘해서 엘리엇 스미스를 들으면서 감각의 논리를 읽고 있는데(음...들뢰즈는 천재에 부딪히는 쾌감을 준다) 두 여성이 무슨 이유인지 티격태격 한다, 싶더니 다짜고짜 주먹질이다, 발길질이다, 팔 다리가 바쁘게 움직인다. 한 명이 자리를 피해서 저만큼 옮겨가고 주위 사람들이 계속 제지하는데도 따라가서 또 머리채를 붙잡고야 만다.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한테는 그런 반응들이 사람들의 방어기제라는 생각도 든다. 왜 싸우는지 내가 내용을 파악하지 못해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 나는 내 맘대로 생각해서, 달이 차고 기우는 여성들의 화학 변화를 자연친화적이라고 여기는데, 한성격들 하시는 여성분들의 인과 관계없는 폭발을 보면 머랄까, 홍수나 가뭄, 폭설, 눈사태 같은 자연 재해를 볼 때와 같은 경외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오늘도 좀 그랬다. * 속초로, 설악산으로 아해들과 차를 몰고 짧게 여행을 떠났다가 한밤중에 도로를 횡단하는 고라니를 치었다. 점점 약해지는 고라니의 숨, 내 손에 전달되던 박동. 기억난다, 아직도. * 미친 소리 같지만, 부가킹즈 특히 두목 바비킴의 목소리와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나는 왠지 그가 곧 죽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맨날, 든다. 나 역시 술 먹는 방법이라고는, 일시적으로 죽을 때까지 먹는 것 외에 별다른 법을 모르는데, 이십대가 끝나고 삼십대에 들어서면서 나는 나의 이 술 먹는 방법이 죽음 충동을 다스리는 법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죽음과 관련된 모든 우리의 '방법'들은 결국 죽음을 다만 유예시키는 법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아니, 사실 우리는 누구도 죽음을 유예시킬 수가 없으며, 다만 그것에 대한 생각과 판단을 유예시킬 수 있을 뿐이다. 어찌보면 그 유예의 시간, 우리가 단 1%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이야말로 존재를 벗어나는 시간이다. 그와 같은 경험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이야말로 존재의 근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 밥은 생명이지만, 밥은 또 계급이지만, 밥은 또 꾸역꾸역 죽음과의 타협의 증거다. 매일 밤 밥을 먹고,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몸을 혹사시키면서 나는 이게 죽음에 대한 저항인지, 친화의 과정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나는 내가 지금 푸쉬업을 몇 개나 했는지를 아득하게 까먹는다.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다가 지르다가 임계점에 이르면 어느 순간 내 몸이 고통스러운 것인지, 고통이 나인지를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는 상태가 있다. 내가 밥이고, 내가 고통 자체가 되는 짧은 순간은 내가 죽음이라는 근거를 잃어버리는 순간이다. 죽음이 없으면 자아도 없다. 환원으로부터 벗어나는 짧은 순간. 우리가 고통이니, 기쁨이라고 부르는 감정의 본래적 의미가 그렇다. * 취향은 개인적 호오의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적인 무관심에 가깝다. '타인의 취향' 에 나오는 사장님은 현실에서 점점 더 존재하기 어렵고,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초대형 빌딩을 장식하는 조각품들과 부르조아의 벽걸이에서 외면받기 때문에 시장이 사라져버린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세계 사이에는 취향을 개인적 호오라고 말할 수 없는 명백한 이유들이 존재한다. 예술이 취향을 늘, 넘어선다는 불가능한 전제 한에서만 예술은 개인적 호오와 관련맺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 취향의 스펙트럼과 갈등하고 계급을 부유하는 광대의 역할을 기꺼이 자처할 때에만 예술은 예술로 호명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취향과 예술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지만, 오롯이 취향만으로 포섭되는 텍스트들을 굳이 예술로 부르는 행위는 저 취향의 '무취미'만을 은폐시킬 뿐이고, 시장주의적 자유주의를 강화시킬 뿐이다. 취향이 예술을 집어삼켜버린 세계에서 취향을 개인의 호오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아무 말도 아니다. 태종태세문단세......매우 그렇다. * 언제부턴가 증상, 현상으로써 존재하는 블록버스터에 대한 계몽적 해석이 뒤로 물러나고 유독 블록버스터에 대해 관대한, 해석들이 득세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맨날 블록버스터를 타자화시키던 계몽적, 권위적 해석의 폭력성을 까발린다는 점에서 환영할 일이지만, 요즘은 유독 블록버스터에 대해서만 관대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사실, 든다. 어쩌면, 블록버스터에 대한 관대함, 관심 역시 저 취향의 '무취미'를 은폐하는 데 일정하게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내가 본 베트맨은 조커가 넘 순박했다. 악인이 머가 그렇게 부지런하냐. * 피터 버거, 천사들에 관한 소문, 문득, 집어 들고 읽다. 아이들이 한밤중에 일어나 공포와 혼돈에 맞닥뜨렸을 때 그 부모가 아이들을 다독이는 것, 신뢰, 질서에 대한 초월적 신호들의 일상적 실재.....리듬은 현실적 시간, 말하자면 죽음으로 수렴되는, 현실의 시간들에 대한 대안이다. 희망. 놀이의 리듬, 시의 리듬은 그래서 죽음에 반항한다. 새로운 실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다. 리듬의 힘이다. 시간의 뒤틀림. 죽음 앞에 성숙한 태도는 리듬을 버리는 일이다. 죽음 앞에 성숙할 것이냐, 아니면 반항할 것이냐.
* 나의 문장은 경기와 연동하므로, 인과관계가 당분간 마비되겠다. 내 인생에는 개가 두 마리,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다. 두 마리 개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내가 열네살쯤 죽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나는 아무런 동물도 안키우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다가 어느 쓰레기통에서 어리고 철없는 연인이 구한 작은 도둑고양이, 예방주사 맞히고 놓아 길렀는데, 내가 집을 비운 어느날 굶주림을 참지 못해 쥐를 잡아먹다가 질식사했다. 참새를 잡아다가 나한테 보여주는 게 어린 녀석의 취미였다. 나한테는 창고 같은 방에 구식 컴퓨털랑, 씨디 플레이어가 장착된 오디오랑 책더미와 담요가 있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너무너무나 커다란 타워 크레인이 지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지상의 자욱한 집들을 다 쓸어버리고, 이해받을 수 없는 *** 때문에 혼자 서 있었다. 살을 다 발라낸 괴수의 척추. 사무실을 나오면 거리의 불빛과 싸이렌과 엔진음이 쏟아져 들어온다. 아니 오히려 상쾌하다. 명쾌하다. 파이프, 고압선, 비보호좌회전, 추돌사고, 트레일러, 난투극 그 모든 것들이 다 내 팔다리와 같다. *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한데, 고진하 시인의 시 중에 '에이허브'라는 시가 있다. 모비딕에 나오는 에이허브를 시에 옮겨온 것인데, 시집이 어디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문장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날카로운 작살로도 겨눌 수 없는(?) 신이라면 무릎꿇지 않겠다' 던가, 대충 시 전문이 그랬던 것 같다.
* there will be blood 를 보고 한참이나 지났는데, 갑자기 영화가 다시 생각났다. 그 영화를 보고 내가 느낀 감정, 내가 느낀 딜레마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는데, 도무지 그게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이 안났더랬다. * 비극적인 영웅은 '악'이 외면화되는 순간 '죄인'이 된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위대한 우연이 치졸한 인과관계로 돌변하면서 범주가 전환된다. 비극에는 선악의 이분법이 없다. 모비딕의 에이허브가 그렇다. 서사시라는 양식이 그렇다. 비극에 있어서는 오직 고귀한 자와 천박한 자의 구분이 있을 뿐, 선악의 구분으로 전환되는 순간 비극의 위계는 뒤죽박죽된다. 블러드에 나오는 석유'광' 플레인뷰는 비극 안에서 살아 있다. 그 고통, 그 욕망, 그 광기는 인간을 넘어선다. 인간적이라는 형용사의 최대치 또 그 한계치를 시험한다. 그가 서 있는 곳이 인간의 최전방이다. 그곳이 인간의 가장 전위다. 김기덕의 '해안선'에 나오는 주인공에게 선악을 들이댈 수 없는 것처럼 나는 그에게 선악을 들이댈 수가 없다. 링이라는 전위, 그 최전방에 몸을 던지는 성난 황소의 주인공에게 선악을 들이댈 수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달리 저 영화들의 주인공은 비극을 살면서 선악의 이분법을 사는 존재다. 그의 고통은 그가 비극적이라서가 아니라 비극을 온전히 살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들의 고통은 그 두 범주의 중첩을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고통이다. 비극에서 선악의 폭력적 이분법 아래로 낙하한 주인공들이 인간적 위엄을 견지하고자 하면 할수록 그들은 기꺼이 악을 감당하는 존재가 된다. 플레인뷰는 목사를 살해함으로써 인간적 존엄에 대해 묻는다. 용서를 구하지 않고, 외면화되었던, 타자화되어 있던 악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악인이다. 아니, 악인 이상이다. 그것을 인간 이상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오만한 일이다. * 만하임을 읽다보니 만하임을 얼렁 읽어치워야 더 재밌는 책을 읽을 수 있겠다는 일념으로 독서를 하게 된다. 만하임 중간중간에 쓸데 없이 이런 저런 책들을 들여다본 시간이 더 많았겠지, 싶다. 만하임이 지지부진, 지겹기도 해서 막 서점에 가서 책을 사고 싶다는 충동마저 생길 정도다. 오늘의 지하철에서 만하임과 엉뚱한 생각으로 만나서 혼자 큭큭 미친놈처럼 웃었더니, 사람들이 무슨 책인가 고개를 빼고 들여다보기도 했다.
오늘의 만하임은 역시나 어제처럼 자분자분하고 골똘, 근엄했는데 내용 중에 운명, 정의, 책임 윤리 라는 대목에서 나 혼자 엉뚱한 생각을 해버렸다. 수업시간에 딴 생각하는 놈이나 매한가지. 만하임 왈, 윤리를 구분하면 결과에 대해 하늘의 순리에 맞기는 '운명' 윤리가 있는가 하면, 결과와 상관없이 인간의 의도와 의지에 집중하는 '정의' 윤리가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결과까지 미리 미리 예측하고 그것을 감당하고자 하는 '책임' 윤리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득 흔히 어장 관리라 부르는 관계 맺음 방식이 윤리적으로 어떤 헛점을 가지고 있는가, 에 대한 생각이 났다. 물론 만하임이 윤리라고 통칭한 저 용어는 다분히 사회적 의미에서 발언된 것이라 내 질문에 적합한 용어인지는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은 빼자. 덥다 더워. 만하임은 여름에 적합한 독서는 아닌 것이다. * 어장관리는 가는 사람 안잡고, 오는 사람 안막는다, 는 거친 슬로건으로 포장돼 있지만, 들여다보면 대단히 섬세한 사회적 구조에서 비롯된 관계 맺음 방식이다.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 사람 저 사람의 감정을 이용해 이를 감정적으로, 경제적으로 이용하는 여성 혹은 남성을 보통 어장관리자라 지칭하는데, 대부분 여성이 어장관리자를, 남성이 피관리자 역할을 맡는 경우가 주로 이야기된다. 흔히 어장 관리라는 부정적인 용어를 대부분 여성들에게 적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사례와 빈도와 상관없이 일단 여성들을 비판하는 데 이 용어가 사용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권력 관계에서 남-여 사이의 여전한 불평등을 무시하고 남성-여성의 권력 관계가 역전되는 경우 '사회적 시선이라고 포장된 다분히 남성 위주의 시선'들이 이와 같은 용어를 만들어낸다는 점은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다. 특히 **녀처럼 근래에 들어 이와 같은 현상들이 자주 출몰하는 데 '불법'이 분명한 남성들의 밤문화, 조직문화에 대한 비판보다 이와 같은 여성 주도형 사회 현상에 대한 '윤리적'비판들이 득세하고 있는 현상은 기형적!!!!!!!! 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또 어장 관리가 여성들에게 특화(?)된 현상이라고 해도 여성의 경우, 좋아하는 이성에게 냅다 고백하는, 고백의 주체 역할보다 고백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압도적이고, 그와 같은 사회적 학습 장치 때문에 고백을 유도하는 기술이 기형적으로!!!!!!! 발달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고 싶다. 어장관리의 기술은 이와 같은 일반적인 연애의 정치학(하하하)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볼 수 있다. * 그런데, 이 모든 사회적 인과관계를 전제한다고 해도 소위 cool 하기 그지없는 어장 관리자들의 논리(타인의 일방적 감정에 대해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책임 윤리의 측면에서 다시 한번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어장 관리자가 되는 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에 있어서 권력 우위의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so cool 한 어장 관리자는 사실 그와 같은 권력 우위의 문제를 애정의 문제로 보기를 요구하지만 그와 같은 이성간의 긴장을 즐길 수 있는 건 권력 우위에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그런 점에서 비난받을 여지가 충분하다고 보겠다.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어장 관리라고 할지라도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변명- 의도, 의지, 고의가 없다면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 역시 '방기'라는 행위가 '책임 윤리'의 측면에서 비윤리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도무지 cool 한 것만을 미덕으로 삼는 이 사회적 분위기가 나는 싫다는 거다. 참고로 나는야 고백이라고는 한번도 받아본적이 없다. 맨날 어깨가 빠져라 컨트롤도 안되는 스트레이트로 고백만 하고 살았다. 그 점은 좀 억울하다. 억울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