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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 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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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배 냄새, 라면 냄새와 곰팡이 쩌든 반지하 만화 대본소. 이현세나 허영만이 문하생도 없이 자신의 만화를 그려나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이름만 팔고 온갖 문하생들이 그들의 그림을, 이야기를 대신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름으로만 남기 시작하면서부터 이현세나 허영만의 만화는 몹시 역겨워지기 시작하더라는 것. 만화의 디테일이 사라지고, 그들이 작가입네, 자신의 만화에 상징적 질서로만 존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의 만화는 우편향이 강화되더라는 것. 나는 솔직히 그 우편향이 자신의 이름을 통해 어떤 공동작업을 하기보다 오직 상징화만으로 비대해지기 시작한 이현세, 허영만의 '작가적' 작업 방식에 기인한 바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놈현을 보면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 반지하 만화 대본소에서 아침부터 라면을 끓여 먹고 낮잠을 청하고 다시 일어나 담배 하나 피워 물고 있는, 나처럼 수업을 빼먹고 아침부터 대본소를 찾는 아이의 눈에 이현세의, 허영만의 커밍아웃은 꽃이 피고 나무가 우거지는 일처럼 자연스럽고 잔혹한 일처럼 보였다. (사실 백수나, 사회적 패자들에게 꽃피고 나무가 우거지고, 가을, 겨울로 쇼윈도가 변하는 장면만큼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장면은 없다) 어둡고 정든 소파에 등을 구부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던 만화는 고행석이었는데, 일단 만화가 대본소용이라는 기능에 충실하여 무지무지 길었다는 것이고 이 내용이 저 내용 같고 저 내용이 이 내용 같아서 집중을 요하지 않아서 또 좋았다. * 내가 세상에 만고 우울하고 히스테릭한 인문학에 집착하게 되는 이유는 저 어둡고 정든 소파에서 구부러져 있는 소년, 소녀들을 해명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아내와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느 만화전문서점에 들러 그 옛날 몹시나 좋아했던 '우주인'(이향우) 세트를 냉큼 사서 돌아왔다. 다시 봐도 좋은 만화다. 우주인에 나오는 우주인은 내 스무살 시절의 이상형이었다. ![]() * 비정규직 조합이든, 오덕후 연대든, 대머리 연대든, 택시 기사 연대든 연대가 없는 진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연대가 없이는 진보의 가능성도 지극히 낮아진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여전히 진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연대가 없이는 반대로 정치적 자기 입장의 확인이 오류로 흐를 가능성이 높고, 자기 이해, 계급적 이해, 정파적 이해의 치열한 자기 검증 절차가 매우 추상적인 단계에서 끝날 가능성이 크다. 결국 그와 같은 철저한 자기 포지셔닝의 확인이 없으면 걍 그런 건 코스모폴리탄으로 휴머니즘으로 하염없이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 된다.
내가 도사도 아닌데 강모군의 누드 퍼포먼스가 '진정'한지, 안한지 알 길은 없지만, 그것이 어떤 연대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조금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건 분명하다. 전복적 개인이 곧 공동체의 전복적 가치를 실현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통시적으로 보았을 때 대단히 우발적이고 우연한 것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전복적 개인의 합이 곧 전복적 공동체라는 사고는 전복의 가치를 단순화하고, 평균화시키는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전복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거꾸로 뒤집는 일이기 전에 획일화와 평균화에 저항한다는 뜻이며, 전복적인 가치는 외부적 조건은 물론, 그 조건으로부터 규정된 자기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로부터 시작함으로써 그 추동력을 얻는다. 자, 그렇다면 진보가 붓다나 명상과 같은 자기 혁명과 무엇이 어디에서 다를 것인가? 연대가 아니라면, 그와 같은 종교적 자기 혁신의 과정과 정치적 진보를 구분지을 뽀족한 방도가 있으려나....... 건담 시리즈를 모조리 독파하고 나면 한 가지 깨닫나니, 뉴타입은 인간 현상이라는 측면에서는 대단히 새롭지만, 현상에 갇히기 쉽고 도구화되기도 아주 쉬운 존재라는 걸 알 수 있다. 극명하게, 우주세기 건담들을 모조리 섭렵한 후에 중력에 붙잡힌 건담 08 소대를 보고 나면 아주 잘 알 수 있다. 나는 강씨가 사회적 진보가 미션 클리어, 의 반복으로 이룩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 '..알지못하나이다' 지젝을 읽다가 잠깐 정신을 놓으면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군가? 하는 안드로메다로 곧바로 날아가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지젝이라는 별에는 중력이 매우 약하다는 것인데....그건 그렇고 라캉은 걍 강의만 들을려고 하려다가 김석 선생의 에크리...책을 사기로 결국 마음 먹었다. 알튀세까지는...너무 멀다 친구여!! 알튀세와 라캉이라....내 친구는 들뢰즈->발리바르-> 알튀세의 순서를 밟고 있고, 나는 지젝-> 라캉 -> 발리바르 ->알튀세, 로 옮겨가는 중이다..... * 지젝은 좀 뽕 같은 측면이 있는데, 읽고 나면 별로 다른 책은 읽고 싶지 않고 지젝만 또 읽고 싶게 만든다는 점에서 별로 좋지 않다. 라캉을 읽어야겠다, 싶어서 서점을 뒤지고 여기저기 알아봐도 마땅한 입문서도 없다는 거....컥....결국 동영상 강의를 찾아 듣고 있다. 재밌긴 한데 라캉으로 지젝을 읽기 시작하니까 머랄까 지젝을 좀 반동적인 맥락으로 읽게 되는 면도....흠........라캉이 끝나면 알튀세르를 읽으리라, 좀 뒤져봤는데...이것두 흠...윤소영 번역이 가장 낫다는데 다 절판.......발리바르는 한 스무 페이지(대중들의 공포) 읽었는데 완전 재밌지만!! 일단 지젝 다 읽고 라캉 다 듣고 발리바르, 알튀세르 읽으려면 이건 머...한참 멀었다...이상한 이야기지만, 대략 발리바르나 알튀세를 나는 지젝의 반동으로 읽으려고 하는 것 같다는......
*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계획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_지젝/ 브뤼메르 18일 완독 / 계급론 완독 / 라캉 듣기) ->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_지젝/ 라캉 듣기 -> 대중들의 공포_발리바르 / 법의 힘_데리다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_벤야민!!) / 폭력의 철학_사카이 다카시 -> 알튀세르!! 순서로 공부하자.....캐치22도 읽어야 하고 이반 데니소비치도 이미 읽기 시작했는데 언제 다 읽게 되려나........젠장 읽다만 고진도 다시 읽겠다고 역사와 반복을 샀다. 동무론_김영민도 읽고 싶어서 맥락없이 또 샀다......이럴 땐 정말 회사 다 때려치우고 집에 틀어박혀서 책만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좀 슬프다. 이걸 다 하고 나면 가을, 겨울은 다 가겠지. 예전의 독서에는 그때그때 독서의 맥락과 맞물려 일종의 개인적인 서사들이 곁들여지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은데.....머 이번 가을, 겨울에도 그런 게 있으려나..... 소녀들 철없다. 무슨 일 한번 있으면 그만이지 또, 또 자꾸 보챈다. 전에 우리 아이 놀러갈 때면, 버스 언제 와? 언제 도착해? 언제 밥 먹어? 언제 집에 가? 언제 씻고 자? 늘 그러더니, 소녀들 너희 잠시도 머물 줄 모르는구나. 빨리 중학교 들어가고, 고등학교, 대학교 들어가고, 빨리 결혼하고, 애 낳고, 빨리 애 초등학교 들어가고, 그러고 나면 또 뭐 할건대? 소녀들, 너희가 그리워한다는 이유만으로 붉은 장미는 피지 않는다. 너희는 또 지지 않는 붉은 그리움을 너희 딸들에게 물려줄 것이다 -이성복
이성복의 상상력이 아파트로 기어들어간 이후로 그의 시들은 이택광 선생이 말하는 중간 계급의 정체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들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지속적인 양극화를 통해 시간이 지날수록, 정권이 바뀔수록 점점 더 계급이 고착되어가고 있는 반면, 대한민국의 중간계급은 대한민국의 압축 성장과 민주화 덕분에, 이름 붙일 수 있는 어떤 계급 정체성에도 뿌리내리지 않은 채 끊임없이 탈주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대한민국의 압축성장과 민주화는 시장과 정치 공학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중간 계급의 입지를 끊임없이 흔들면서 이들이 혼란스러운 계급적 정체성을 견지하기보다 (탈주의)욕망과 (몰락의)공포에 굴복하는 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가족주의와 조직논리, 민족주의와 같은 대체물들은 이들 중간 계급의 텅 빈 계급 정체성을 메우면서 개인적인 자기 정체성까지 잠식해들어가 가장 몰계급적이면서도 가장 계급에 민감한 존재를 만들어냈다. 중간 계급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이 상상하고 있는, 혹은 꿈꾸고 있는 계급 상승 혹은 탈주의 가능성이 차단되는 것이다. 중간 계급에게는 몰락에 대한 공포가 있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이 자리에, 고착되고 정의내려지는 것이다. 쎈과 치히로가 머무는 환상의 세계는 진짜 이름을 자발적으로 반납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세계이며, 반대로 진짜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사라지는 세계다. 중간 계급이 누리는 대형 마트의 풍요로움과 뒤틀린 민주화는 이처럼 계급적 자기 정체성을 반납하는 댓가로 존재하는 세계다. 중간 계급은 아버지, 어머니, 아내, 가장, 부장, 과장, 민족과 같은 가짜 이름을 통해 유지되며 새로운 가짜 이름을 획득하면서 확장된다. 그런 점에서 이성복의 시에 등장하는 소녀들이야말로 중간 계급이 자기 정체성에서 끊임없이 탈주하고자 하는 욕망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낭만적이지만, 명쾌한 텍스트다. *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상무: 오오~ 청바지 멋진데?
-> 오답: 그렇습니다.! 이게 제가 아끼는 xx진 xxxx라는 모델인데요, 어쩌구... -> 정답: 아, 제가 오늘 봉사활동을 다녀오느라구, 복장이 좀...ㅎㅎ....... 상사들이란 직급이 올라갈수록 다양한 구질의 언어를 구사하는데, 그 나이에도 150km짜리 강속구를 스트레이트로 던지는 상사는 곧 어깨가 망가지거나, 뭔가 지속적으로 스테로이드를 장복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는 게 좋다. 위 대화는 전형적인 커브를 구사하는 상사의 대화 구질을 예로 들어본 것이다. 배트스피드가 높아야 한다고, 조직은 외치지만 그건 거짓말이고, 구질을 잘 파악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제일 최악은 오로지 컨트롤 안되는 직구만 던지는데 스트라이크라고 우기는 경우다.(머 대부분이 그렇다고 보면 된다) 그와 같은 억지가 반복되다보면 대부분의 경우 조직마다 왜곡된 스트라이크존을 가지게 되는데, 그런 걸 조직 문화라고 한다. * 말할 것도 없이 자연은 곧 역사가 아니다. 진화론적 맥락이라고 해서 자연이 역사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도 아니다. 자연을 곧 역사라고 오해하는 순간이 바로 야만이 탄생하는 지점이다. 87년 민주화 체제가 지금까지 진행해온 역사는 브뤼메르 18일에 묘사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의 자연발생적 흐름을 그대로 닮아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브뤼메르 18일에서 묘사된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탄생, 정착 과정이 대한민국에서는 무려 20여년이라는 긴 시간을 두고 이루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87년 민주화 체제는 사실상 부르조아민주주의의 탄생과 정착 과정이라고 부르기보다 그 지체와 지연의 시기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좀 더 정상적인 태도일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지연과 지체는 87년 민주화 체제가 엄청난 희생을 댓가로 이루어진 '민주화'라는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로, 제헌의회나 국민의회조차 구성하지 못한, 어쩌면 다만 '보통 선거권'을 획득한 것에 지나지 않는 체제였다는 점에 기인한 바가 크다. 브뤼메르 18일에 묘사된 의회 민주주의 체제는 간략하게 이야기해서 의회가 프로레타리아를 배제하고, 그 다음엔 소부르조아지를, 그 다음엔 부르조아지마져 배제하는 '부르조아 민주주의 체제'의 역설을 묘사하고 있다. 요컨대 87년부터 이명박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의회 민주주의 역시 이와 같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실현이었으며, 더 정확하게는 그 부르조아 민주주의 체제마져 지연시켜왔다는 점에서 개혁적이거나 진보적이기는 커녕, '진화론적인' 맥락에서조차 대단히 퇴행적이었다고 묘사하는 것이 타당하다. 스스로 외롭고(?) 미안한 말이지만, 진보적인 맥락에서 박정희-전두환 같은 전체주의 체제를 '강박적으로' 적대시하는 행동은 민주주의 체제 자체의, 또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체제의 퇴행성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사실 그와 같은 전체주의에 대한 적대적 강박은 군사독재와 같은 외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꿈꾸는 우리들의 반동적 환상이 혹시 '실현'되지 않을까, 실현되었지 뭐냐!!! 하는 당혹과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촛불 집회 이후 등장하는 '집단 지성'이라는 용어는 이와 같은 강박을 설명할 수 있는 '징후'는 될 수 있을지언정 '공적 지식-지식인'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무엇이라고 나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다. 집단 지성의 등장과 이명박 정권의 탄생은 설사 지금 불화하고 있을지라도 민주주의에 대한 같은 전제를 통해 탄생한 쌍생아에 가깝다. 민주주의 체제의 '자연발생적'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절대 민주화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려면 민주주의로부터 전체주의라는 환부를 도려내는 외과적-위생학적 노력이 아니라, 좌파적 대안들을 통한 면역학적? 통찰이 필요하다, 는 생각이다. 촛불 집회를 통해 내가 얻은 것이 나는 다시 최장집이나 아렌트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 뿐이라서 외롭다......알튀세를 다시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참 번역이 개판이어서 좀 더 좌편향으로 옮겨 가기가 어려운 점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 도무지 구하기 어려웠던 캐치 22가 다시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냉큼 동네 책방에 달려가서 사왔다. 사는 김에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 도 샀다. 오랫만에 소설책을 구입했다. * 어젯밤에 올린 글을 보니 머...논리라기보다 나의 무의식...을 싸질러...아무튼...원래 분노는 아주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 공부를 하면 공부가 되어야 되는데, 지젝한테서 프로파간다만 읽어내고...그걸 또 개인적인 분노에 연결시키는...아주아주...좀...차라리 그냥 쇼핑을 해라... * 경제전문가는 아니지만, 그 무수한 파생 상품의 세계에서 실물 경제의 움직임을 걱정하는 건 '촌스러운' 짓이었을 게다. 그곳에서 실물 경제란 자본의 움직임을 예측하게 하는 아주, 사소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금융 시장만 그러할까. 문화 자본 역시 꼭 같은 길을 걸어 가고 있다. 영화며, 문학 또한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문학 안에서도 노동은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노동 시간이 길면 길수록 가난해지는 것이다. 서정주가 가난은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발언할 때 그 낭만주의에 욕지기가 일어나는 것처럼, 이성복이 어머니를 신화할 때 역시 나는 같은 욕지기를 느낀다. 이성복이 가지고 있던 창녀와 어머니의 이분법은 낭만적이고 우파적인 자가발전이었는지도 모른다. 용산에 집창촌을 밀어내고 들어서는 개발의 욕망은 그 이분법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말해준다. 정말이지, 나는 이 삶이 너무나 헐겁다. 혹사가 약간의 광기를 포함하고 있다면, 혹사를 포기하는 순간은 더 많은 광기에 노출돼 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조금 덜, 우울할 때 죽어나가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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