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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탄트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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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 좋습니다. 올해가..
by 뮤탄트 at 17:53 뮤탄트님 블로그 보면 .. by 쟁가 at 16:10 아래 위로 다섯 살 까지는.. by 뮤탄트 at 01:19 글구 보니 쟁가님과 뮤.. by 아큐라 at 10/12 저도 그 냄새나는 소파에.. by 쟁가 at 10/12 흠....힘내세요 아큐라.. by 뮤탄트 at 10/04 소녀들을 보면 마음이 .. by 뮤탄트 at 10/04 순간 울컥하네요. 띠발 .. by 아큐라 at 10/02 저 역시 저 오답의 시행.. by 뮤탄트 at 09/30 변화구가 오건 말건 홈런.. by 뮤탄트 at 09/30 최근 등록된 트랙백
이글루 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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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한데, 고진하 시인의 시 중에 '에이허브'라는 시가 있다. 모비딕에 나오는 에이허브를 시에 옮겨온 것인데, 시집이 어디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문장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날카로운 작살로도 겨눌 수 없는(?) 신이라면 무릎꿇지 않겠다' 던가, 대충 시 전문이 그랬던 것 같다.
* there will be blood 를 보고 한참이나 지났는데, 갑자기 영화가 다시 생각났다. 그 영화를 보고 내가 느낀 감정, 내가 느낀 딜레마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는데, 도무지 그게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이 안났더랬다. * 비극적인 영웅은 '악'이 외면화되는 순간 '죄인'이 된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위대한 우연이 치졸한 인과관계로 돌변하면서 범주가 전환된다. 비극에는 선악의 이분법이 없다. 모비딕의 에이허브가 그렇다. 서사시라는 양식이 그렇다. 비극에 있어서는 오직 고귀한 자와 천박한 자의 구분이 있을 뿐, 선악의 구분으로 전환되는 순간 비극의 위계는 뒤죽박죽된다. 블러드에 나오는 석유'광' 플레인뷰는 비극 안에서 살아 있다. 그 고통, 그 욕망, 그 광기는 인간을 넘어선다. 인간적이라는 형용사의 최대치 또 그 한계치를 시험한다. 그가 서 있는 곳이 인간의 최전방이다. 그곳이 인간의 가장 전위다. 김기덕의 '해안선'에 나오는 주인공에게 선악을 들이댈 수 없는 것처럼 나는 그에게 선악을 들이댈 수가 없다. 링이라는 전위, 그 최전방에 몸을 던지는 성난 황소의 주인공에게 선악을 들이댈 수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달리 저 영화들의 주인공은 비극을 살면서 선악의 이분법을 사는 존재다. 그의 고통은 그가 비극적이라서가 아니라 비극을 온전히 살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들의 고통은 그 두 범주의 중첩을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고통이다. 비극에서 선악의 폭력적 이분법 아래로 낙하한 주인공들이 인간적 위엄을 견지하고자 하면 할수록 그들은 기꺼이 악을 감당하는 존재가 된다. 플레인뷰는 목사를 살해함으로써 인간적 존엄에 대해 묻는다. 용서를 구하지 않고, 외면화되었던, 타자화되어 있던 악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악인이다. 아니, 악인 이상이다. 그것을 인간 이상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오만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