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소장님들

돌아왔다. 블로그스팟 거지 같아서 몬살겠다.

그리고 이제 다시 블로그도 열씨미 할려구. 나의 소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뭐가 됐든 나는 문장을 만들어야 겨우..잠재적-범죄적 성향을 막을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상의 모든 소장님들은 지혜롭다. 왜냐하면 최소한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이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수긍하고 있기 때문이다.

운명에 순치된다는 것은, 자기 비전과 정직하게 맞닥뜨린다는 것과 같다. 나이가 들어서, 노동 능력이 저하되기 전에 나도 나의 비전과 만나고 싶다. 그것이 아무리 초라한 것이든, 동굴처럼 까마득한 것이든 말이다. 도망다니는 일은 이제 그만둘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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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재 시인의 시였는지, 이문재의 산문이었는지, 이문재에 대한 산문이었는지,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는 메모지들에 대한 글이 생각난다. 먹고살기 어려운 시인들의 사정은, 왕왕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과 쪽글들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풍경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 가난한 쪽글들이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다면, 반대로 팡세 풍의 잠언들은 '글쓰기의 쾌락'에 대한 금욕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침묵을 향하는 언어'로 흔히 표현되는 잠언들이 감추려고 하면서, 또 어쩔 수 없이 보여주는 것은 글쓰기라는 행위가 불러내는 주이상스다. 근데, 트위터가 보여주는 것은 언제나, 어떤 말이든 침묵보다 낫다는 메시지다. 침묵은 금, 이라는 말은 금태환제가 존재하던 시대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맘에 든다.

* 자전거를 타고, 맹산..인가 하는데를 올라갔다 내려와서, 고기를 먹고, 예술의 전당에서 상도동 집까지 자전거를 탔다. 헥헥헥헥. 폐달을 밟는 발이, 허벅지가 '고통을 더 다오. 조금 더! 조금만 더!!' 를 외친다. 그건 그렇고, 이 고통과 별개로 아주 길 가 양 옆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 자전거를 타면서 생각난 것인데, '방어'라는 말을 쓰는 이상 정신분석은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어' '방어기제' 라는 말이 '심리학'과 '정신분석'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 삼성이라는 메인 스폰서의 존재는 이번에 나온 피디수첩 검사 어쩌구 이야기를 한 순간에 코메디로 만들어버린다. 삼성이라는 존재는 곳곳에서 대한민국의 윤리적 원근법을 뒤틀어버린다. 

*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대상에게 가 의미있는 '체험'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만일 그 대상이, 그 타자가 히스테리증자라면? 히스테리증자의 입장에서 사랑받는 일이란 '알 수 없지만 체험되는 어떤 것' 이다. 그러나 히스테리증자에게 '체험'이란 기본적으로 외상적인 것이고, '앎'을 지연시키는 어떤 것이다. 히스테리증자에게 '체험'은 전체를 조망하는 '앎'의 외연을 자꾸만 확대시키기를 요구하는 어떤 것이며, 차라리 '예외'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무엇이다.

 언어가 선재적이라면, 사랑은 선험적이다. 사랑은 '앎'을 통하지 않고도, 체험으로 곧바로 수렴된다. 히스테리증자에게 이 같은 사랑의 직접성은 '앎'의 무기력을 폭로하는 위협으로 작동한다. 사랑의 선험성은 언어의 선재성을 위협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에게 끊임없이 '자기 동일성'을 확인시키는 존재다.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자신과 타자 사이의 '차이'를 확인하는 일이 된다는 점에서, 사랑은 히스테리증자가 스스로를 '앎'의 일부로 귀속시키는 일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  때문에 히스테리증자는 사랑을 받아들일 때, 이유를 원한다. 이유가 사랑을 근거 있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이유가 사랑을 지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선험성은 언제나, 히스테리증자의 이와 같은 기획을 철저하게 무력화시킨다. 히스테리증자가 사랑에 노출된다는 것은, 불안과 위협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 똥은 언어화도 되지 않고, 외상으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똥을 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고유명사와 기능적 언어 사이에 좌표가 존재한다. 좌표는 고유명사도 아니며, 또한 기능성을 갖고 있지도 않다. 좌표는 위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질량 없는, 현존하지 않는 어떤 것을 불러내는 방식이다. 그것은 무와 존재 사이의 '0'이다. 그것은 불안의 기표다. 사랑의 대상인 타자, 그 타자를 불러내는 고유명사가 내 입밖으로 나오는 순간은 내가 좌표화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완전한 차이를 통해 타자를 불러내고, 타자의 오직, 그 자신만의 우주를, 고유명사를 통해 불러냄과 동시에, 스스로의 존재를 부인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좌표로 존재하는 나는 내가 그동안 나라고 생각했던, 자기 동일성을 의심함으로써 진짜 주체를 찾아내는 새로운 길로 들어선다. 나는 내가 불가능한 곳으로 진입한다.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나를 구성한다. 좌표는 그러나, 이와 같은 발견의 가능성이 깃드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자기 부인의 가능성도 품고 있다. 좌표는 좌표로써 존재할 수 없다. 좌표는 나와 너 사이의 차이의 공간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내가 나도 아니고, 내가 당신도 아니라는 뜻이다. 좌표는 타자의 호명에 의해서만, 그리고 부정적으로는 오직 죽음에 의해서만 해소되는, 그리고 오직 해소되기 위해서만 운동하고 태어나는 기표다.

    * 그렇다 치고 요즘 나는 스파르타쿠스를 열심히 보는데, 근육들이 장난 아니다. 그런데, 정말 검투사들의 근육이 저랬을까...아니, 저건 교양인들이 만들어낸 어떤 환타지다. 그게 실현된 것이겠지. 예전에 권투로 먹고 살려다가 실패해서, 청과물 도매상하다가 실패한 친구 놈이랑 같이 정말 개발에 땀나도록 일하다 사우나에라도 같이 가는 날이면, 등짝이...그 친구왈 등짝에만 근육이 붙는다는 것이다. 권투할 때는 맨날 가드 뒤로 몸을 숨기느라 자세가 구부정해서 그렇다고 하고, 육체 노동으로 벌이를 하는 날들이 지나면서 자기 몸이 무슨 지렛대 같은 것처럼 변해간다고 그랬다. 내가 맞아봐서 아는데;;; 아무튼 싸움은 등짝, 목..그런 걸로 하는 게 맞다. 저 스파르타쿠스에 나오는 검투사들의 몸은, 불필요한 근육으로 만들어진, 교양인들의 환타지다. 도무지 균형잡힌, 혹은 전인적인 교양이라는 것들은 다 그 따위다. 그것들은 기능, 아니 노동으로 점철된 인간의 역사를 은폐하는 데 바쁘다.  

     

    * 타란티노 영화 중에 잭키 브라운이라는 영화가 있다. 늙어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한 늙은 스튜어디스가 나오고, 늙은 보석 보증인이 나온다. 머 큰 환타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뭐 크게 변할 것도 없는 심심한 삶이다. 뭐 씨발 죽을 때까지 자기계발하고 외국어 배우고, 지랄들 하고...도전하고, 난리나는 삶....그렇게들 살아봐라. 좋은가.

     아무리 길게 잡아봤자, 딱 80살 정도까지 산다. 내가 신이라면, 니들한테 이렇게 말하겠다. '난 뭐 니들이 한 1,000년은 살 줄 알았어~' 혹은 '깝치지 좀 마라'....

     글쓰기는 '자기 전이' 다. 창작자는 창작자의 삶에 전이된다. 혹은 창작자의 삶은 창작자에 전이된다. 혹은 창작자는 문장의 주인에게 전이된다. 글을 쓰면서 나는 분리되고, 또 분리된 것에 동화된다. 때문에 전이가 일어나는 그 장소는 곳바로, 우발성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주체가 주체에게 주도권을 내어준다. 균열과 틈을 허가한다.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고통이 되돌아오고, 그것이 남김없이 해명된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다른 주체를 탄생시킨다. 불가능한 주체가 가능한 주체를 불러낸다. 뭔 소리냐.. - -;;;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어떤 욕망들을 완전히 말살시키고, 누군가의 욕망에 완전히 투항하라는 말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알 수 있다는 것은 좀 과장이다.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니까...뭘 모를까? 자신의 욕망 말이다. 욕망은 언제나 타자의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반드시 정치적인 것인데, 정치적으로 백치이므로, 좃도 욕망에 대해서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이야기가 샜다.... 열받네.

     좋다. 양보해서 탈정치적으로 생각해보는 거다. 당신이 켄 로치 영화를 보고도 아무런 신체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가정하자. 참고로 나는 켄 로치 영화를 보면, 눈이 충혈되고, 몸에서 식은 땀이 마구 나며, 손발이 지 멋대로 움직이고, 체온이 70도 이상 올라가 헛소리를 중얼거린다. 심한 경우에는 귀에서 북치는 소리가 들리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당신이 켄 로치 영화를 보고도 위에 열거한 어떤 증상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개뿔이나 정치적인 감수성이 없는 사람이다. 불구라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당신은 불구이고, 나는 어떤 종류의 클리닉이다. 사실 이 땅에는 정치적 불구를 위한 클리닉이 몹시 매우 많이 존재하고 있다. 조선일보나, 여타 신문들이 그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서 정치적으로 불구인 사람들이 매우 몹시 살기 좋은 나라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은 사회적 복지는 그냥 개판인데, 정치적 복지가 매우 기형적으로 발달된 나라라고 보면 된다. 심지어는 정치적으로 불구인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아주 상식적인 사람들을 윽박지르는 모습도 왕왕 보일 만큼, 성숙한 정치-복지 제도와 공동체적 정치 윤리를 갖고 있다. 그래서 정치적 불구를 위한 클리닉이라고 하면 조선일보를 곧장 떠올릴 수가 있기 때문에 나는 클리닉이긴 하되, 반드시 당신이 불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회원카드를 끊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클리닉이라고 가정하자. 이 클리닉 안에는 작고 어두운 방이 하나 있고, 그 방에는 작은 수상기가 놓여 있는데, 그 화면에는 1년 365일 켄 로치 영화가 돌아간다. 당신은 그 방에 들어가서 30분에서 1시간 여 동안 화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 시간 동안 당신에게 아무런 신체적 변화가 없으면 당신은 불구다. 조선일보 클리닉에서는 화면에 김정일의 일상이나, 뉴타운 개발 장면이나, 이건희의 얼굴 따위를 띄워놓고 당신의 신체적 변화를 읽는다고 들었는데, 그 방법 역시 정치적 불구를 선별하는 좋은 방법이다. 다만, 당신이 불구인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게 조선일보의 영업비밀이다.

     자, 이제 길고 아름다운 선별 작업이 끝났다. 당신은 정치적으로 불구다. 동시에 행운아다.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불구인 당신을 한 사람의 상식적이고, 온전한 인격으로 대해줄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는 보기 드문 나라니까.  

     나, 클리닉은 당신이 불구라는 전제 하에 말하겠다. 당신의 욕망은 오로지 우발성을 통해서만 해명되는 것이라고, 아니 오히려 그 우발성을 통해 욕망보다 더 한 실재가 도래한다고....당신이 당신의 욕망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우발적인 것에 아무 면역력이 없다면, 그것은 의심해봐야 한다고. 그것은 전혀 당신의 욕망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아니, 더 엄밀하게 말하면, 당신이 타인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사로잡힌 것이라고. 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도대체 누구의 욕망을 실현하고 있는 것인지 물어보야 한다고.

     아무 연고도 없이, 우리는 도시로 올라와 숲처럼 울창한 골목들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의 비극과 난투극, 소란스러움, 탄식, 절망, 단순한 기쁨과 깊숙이 숨어 있는 증오들.... 내 환상은 그곳에서 완성되었다. 1465번지의 골목에는 세상 어느 곳보다 부드러운, 비가 내리는 밤이 있고, 여자들을 실어나르는 승합차들과, 견습 선반공들과 농구 코트, 검문과 어린 날치기들과 계단......

     우리는 이곳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도 길고 긴 전쟁의 일부일 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나에게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 뿐이다. 생각한 것보다 이 전쟁은 훨씬 더 긴 것이었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늘조차 내려놓을 곳이 없는 이곳의 신에게라도 나는 기꺼이 무릎 꿇고 비나니,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다가오는 전투를 견뎌녈 인내를 주소서. 그리고 힘껏 축복해주소서. not enough!!

     * 이분법은, 고착된, 잘못된, 인과 관계의 전면화다. 적대적으로 보이는 이분법의 두 범주는 실은 같은 인과관계를 따르고 있으며, 그 인과를 생략함으로써 이분법은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면화된 이분법은 그 인과를 해명할수록 무력화된다. 말하지면, 이분법은 진짜 인과를 은폐하기 위한 가짜 적대, 가짜 전선의 전면화이다.

     그래서 이분법이 보여주고자 하는 두 가지 상반된 가치의 공존, 그것으로부터 유발되는 불안과 위기감은 이분법이 감추고 있는 진짜 인과가 가지고 올 더 큰 공포, 더 큰 위기에 대한 방어다. 이를테면, 민주대 파쇼의 이분법은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혁명에 대해 품고 있는 위기감과 공포에 대한 방어다.

     

    * 이와 같은 매커니즘은 성폭력 피해자에게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성폭력 이후 피해자에게 나타나는 성적 욕망에 대한 강력한 억압과 동시에 강화되는 성욕은, 금지에 의해 더 강화되는 욕망의 매커니즘을 넘어, 불안을 조장한다. 실은 이 불안이야말로, 그가 선택하는 방어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이라는 쾌락을 완전히 말살시키는 전적인 폭력, 무력감, 외상으로부터 주체가 성을 보호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이 금지-쾌락의 이분법을 통해 발생하는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외상은 존재하지만, 그것에 대한 감각적 실존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그는 외상의 도래를 지연시킨다. 불안은 그가 외상의 도래에 대비해 끊임없이 자신의 기억과 감각을 재구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외상은 끊임없이 그의 현재에 도래하지만, 그는 자신의 기억, 감각의 왜곡, 은폐, 재구성을 통해 그 논리적 시간을 뒤트는 것이다.

     그는 지금 여기 있지만, 그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된다. 자신의 좌표가 발각되는 순간 외상이 그를 거머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현존을 끊임없이 지연시키고, 그것을 위해 '외상'의 입장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의심함으로써, 외상으로부터 좀 더 효과적으로 스스로를 은폐시키려고 한다.

     이분법 말고 그가 도대체 어디에 숨을 수 있겠는가?  
    * 마초는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법이 없다. 마초는 오로지 스스로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 마초 나쁘다...나는 마초가 아닌 것 같다. 당신 대신 울고 있을 때.

     

     * 그렇다면, 외상에는 어떤 원형이 있을까?. 외상에는 오리지널이 없다. 외상은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텅 빈 기표다. 항구적으로 반복되는 고통이 있을 뿐. 외상은 증상을 통해 반복되는 어떤 오리지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복이 외상을 영원한 원형으로 오해하게 만들 뿐이다. 외상이, 어떤 자극을 통해 다시 언어라는 상징 질서의 궤도를 뚫고 언어의 질서를 부서뜨리며, 다시 등장할 때마다 외상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며, 다른 증상을 옷입는다. 왜냐하면, 외상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상은 바로 그 재구성 그 자체이며, 어떤 경향이다. 물론, 그 재구성은 비언어적 재구성이다. 비언어적 재구성이라는 이 형용모순이 가능하다면....

     

     외상을 언어적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이 생략되는 한, 외상은 언제든 돌출해, 상징 질서를 깨부순다. 외상은, 강력한 고통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또한 지금 주체가 몸담고 있는 상징 질서를 완전히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기존의 상징질서가 비언어적 외상을 자신의 질서 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외상은 예외적, 비언어적 외상 자체를 기준으로 언어적, 상징적 질서를 완전히 재구성하려고 든다. 그런데, 외상이 돌출하는 뇌관은 반드시 언어적이다. 외상이 비언어적이라고 해서, 그것을 충동하는 원인이 비언어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그 인과관계는 비언어적이겠지만....

     

     그러니까, 외상은 언어적 질서에 의해 돌출되는 비언어적 충동이다. 외상은 언어 질서 안으로 편입되지 못한 경험이다. 언어 질서로부터 배제된 경험. 그러니까, 외상이 돌출하는 통로는 욕망을 넘어서는 충동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충동이 언어적 질서를 넘어서는 인간의 실존적 차원을 보여주고, 그 비전을 넓혀주는 긍정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반면.....외상은 언어적 질서와의 공존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외상이 예외로써 구성하는 '전체'는 부조리하기 그지 없는, 인간으로써 견딜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외상에 압도당한 주체에게 충동이란 결국 같은 것이다. 실존적 지평을 넓혀주는 충동과 언어적 질서를 완전히 파괴하려는 외상 사이에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을 넘어서는, 아니 고통을 관통하는 기쁨과 기쁨을 관통하는 고통...그 실존적 감각 사이에 차이가 없다. 아니, 외상에 압도당한 주체는 그 차이를 지우려고 한다. 차이야말로, 주체를 주체로 세우는 가장 큰 근거이기 때문이다.

     

     외상에 압도당한 주체는 상징 질서 자체에 자신의 주도권을 완전히 내어주려고 한다. 왜? 외상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서....강력한 상징 질서가 외상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차이는 상징 질서 안에 완전히 매몰되고 싶은 주체를 자꾸만 주체로 불러낸다. 숲 속에 숨어 있는 나무를 숲 바깥으로 불러내, 외상 앞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외상에 노출된 주체에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기존의 상징 질서를 더 강력한 것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외상을 상징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는 고통스러운 길이 그것이다.

     

    * 기형도의 시는 반동적이다, 감상적이다. 그런데 그 감상주의라는 레떼르를 손쉽게 붙이기에는 무엇인가, 더 해명해야 할 것이 있다. 우발성. 불행해서 고통스러운...손쉬운 인과관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우발성, 죽을 목숨들이 가지는 우발성, 인과를 벗어나 우발성을 통해 환기되는 주체를 불러내고, 인과와 보편으로부터 내쳐진, 그러나 도드라진 주체, 돌발하는 주체를 드러낸다. 그의 시에는 임박한 주체의 탄생, 혹은 주체의 자각이 선명하게 묘사된다. 또, 숨어버리게 될 운명을 가진 주체가.

     

     

    * 음 유인나....유인나가 잘 안되서 야한 화보 찍었음 좋겠다...

    음 제시카....제시카가 소시 탈퇴했는데, 잘 안되서 야한 화보 찍을 날도 있을꺼야....

    음 김연아......그러니까 우리 루저들은 그냥 그런 생각을 가끔 할 때가 있다.....

     

     

     실제로 많은 경우, 이 같은 방식은 급격한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여기에 회의를 느낀 프로이트가 최면 치료를 포기하는 순간, 혹은 그가 피분석자의 이성적 언어를 통해 분석적 치료를 시작한 순간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탄생한다. 프로이트의 책을 읽으면서 만나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내가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하고 있다는 생생함에 있다.

     

    * 프로이트가 피분석자의 소위 성적인 주제를 향해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내디디고 있는 장면들은, 성이야말로 예외적 방식으로 작동하는 '문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만큼 반복적이고, 충동적이며, 우발적인 것이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성은 문화적 양상들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기도 한다. 그런데, 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가 부패할 것임을 인정하고, 죽을 목숨들임을 받아들이며, 또 한편 우리의 내장을 거기에 걸어놓아, 그 사실을 상기시키고, 선포한다.......

     

    * 대부분의 욕망은 결여를 메우고, 보충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히스테리의 주체는 외상을 배제하고, 격리하고, 폐쇄시키려고 한다. 히스테리는 외상 때문이 아니라, 외상을 폐제시키려는 주체의 욕망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니까, 히스테리의 주체는 결여를 확보하고자 하는 주체이면서, 이미 그것에 실패한 주체이다. 그러므로 결여가 결국 '아버지의 부재'의 다른 이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히스테리증자가 아버지의 자리(결여)를 강화시키고, 또 한편 외상을 폐제시키려고 하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일관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 모든 부재는 '존재'의 예외로써 기능하기 때문에, 결국 존재를 그 전체로 가능하게 만든다. 그것이 부재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히스테리의 주체는 예외를 가지지 못한 주체다. 히스테리의 주체에게 예외는 오직 그가 폐제시킨 외상 뿐인데, 외상은 평소에는 완전히 폐제되었다가, 돌발하는 순간 '전체'의 구조를 환기시키고 폭로한다. 히스테리의 주체가 가진 유일한 예외, 즉 외상이 전체를 규정한다. 때문에 히스테리증자는 스캔들로써 '전체'가 폭로되는 쪽을 선택하기보다, 주체 스스로를 섹터화해 이곳에 스캔들을 가둔다. 히스테리증자의 죄의식은 '전체' '세계'라는 스캔들을 자신의 몸안에 옮겨놓은 희생제의다.


7

* 심상정 대표가 경기도지사 후보직을 사퇴했다. 그런데 당원들이 유시민 지지로 돌아설 가망이 있을까...유시민이 이번 선거에서 패배하면, 유시민도 외로워지고, 심상정도 외로워지고, 진보신당도 이미 외로운 거 더 외로워지는 결과를 나을 것이다. 서로서로 외로워지는 길을 선택한 게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심상정 대표가 선거 기간 내내 사무치게 외로워서, 어디 니들도 함 외로워봐라...이런... 억하심정이 아니었기를...이런 못난 생각까지 든다.

 

* 확실히 현대시는 언어의 기능적 함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운동의 성격은 좀 여러가지다. 이를테면 '우산'이라는 말의 지시적, 자의적 의미(실은 언어에 자의적 의미라는 건 없다)를 완전히 제거하고, 우산-전화- 연필...과 같은 자유연상을 통한 언어의 연쇄, 관계의 상징화로 나타나는 경우가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주부생활 5월호' 같은 말을 시적 언어 안으로 편입시키는 운동이다.

 

 기능적이라는 말은 언제나 교환가능하다는 말이다. 현대시가 이 교환불가능성을 사수하기 위해 거쳐온 운동의 역사는 그래서 흥미진진하지롱.

 

2010년 5월 24일 월요일

본격 좌파 정당....

* 이번 선거가 끝나면, 진보신당은 본격 좌파 정당이....될 것만 같다...이런 저런 사람들이 난리를 칠 것이고, 그러고나면 얼어죽을 각오를 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오갈 데 없는 이들만 이곳에 남을 것이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라면 뭐...좌파들 밖에 없잖아.... 좌파를 빼고, 나머지들은 한 걸음씩 오른쪽으로 옮겨 가면 뭐 한 줌의 좌파들만 남는 거지. 가난의 대물림이 아니라, 고난의 대물림. 그래도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 안그러면 저들은 또 저들이 얼마나 오른쪽인지 잊어버리게 될거야.

2010년 5월 23일 일요일

부인(否認) / 도착 / 합리

* 도착은 부인이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도착은 그래서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다른 이들에게는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존재이므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도착자들이 '믿는 것처럼 행동'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존재의 인과를 추궁하는 것이다. 존재의 이유를 추궁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그 이유를 스스로 생산할 수 없다. 존재의 기투성은 그래서, 상징성과 상호 의존적이다.) 그 인과가 치밀할수록, 자세할수록 도착자는 '존재 여부'에 더 늦게 도달한다. 그런데,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부재를 믿는다. 그는 '존재 여부'에 도달하는 것을 지연시키지만, 또한 '부재의 확인'이 스스로에게 도래하는 것을 지연시키고 있기도 하다. 도착의 뫼비우스는 이처럼 안과 바깥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도착은 역전이 아니라, 구분과 차이의 폐기다.  

 

2010년 5월 22일 토요일

양아치를 위한 정치

* 한참 양아치일 때 우리한테 딱 하나 선생이 있었다. 미군 기지가 자리 잡고 있는 지방 중소도시에 항상 딱 떨어지는 수트를 입고 멋지게 차려입고 다니는 중년의 물리 선생. 내가 자퇴하고 사고치고 싸돌아다닐 때, 나한테 이십만원을 주고 어줍잖은 충고 한마디 안하던 선생. 나한테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우리 패거리들한테 공평하게 관대하셨댔다. 어느 설날에 삥뜯은 돈으로 뭘 사면 좋을까, 같이 놀던 여자애들한테 물어 물어 난생 처음 커프스 단추라는 걸 사들고, 선생 집으로 가는데 전날 술처먹고 나랑 개잡놈처럼 싸웠던 개잡놈이 정종 같은 걸 이쁘게 싸들고 선생 집으로 올라가고 있더랬다.

 

 대가리는 빨갛게 염색을 하고, 귀걸이 하고, 고새를 못참고 또 어느 놈하고 싸웠는지 왼손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가봤자, 인사나 꿈벅하고 사모님한테 주스 한잔 얻어먹고 내려오는 게 다였다. 그 선생한테 찾아가뵌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그 선생이나, 그 선생 비슷한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개잡놈 생양아치라도 설날 정종을 사서 인사드리러 가는 그 자리에 그 선생 말고 다른 것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아무리 개잡놈 생양아치라도 노동조합원이었으면 좋겠고, 아무리 인격이 진창 하수구라도 자기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사하러 다니는 날들이 설날 말고, 노동절이었으면 좋겠고....내가 정치에 대해서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은 저 대가리를 빨갛게 물들인 어느 생양아치의 모습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의자

*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체어. 갖고 싶다. 덩치가 커서 넓적한 것이 마음에 들고, 내 덩치가 미안하지 않다. 이름도 바르셀로나. 리드미컬한 것이 아름답지 뭐냐. 바르셀로나에 앉으면, 집 천장이 훨씬 높아 보인다....왠지 바우하우스풍에 걸맞지 않는 이름이지만 뭐.

 

* 집에 있는 바실리. 집이 너무 좁아서, 가방받이로 쓰고 있지만, 아름답고, 편하다. 이 녀석도 바우하우스의 대표선수라고 하는데.... 도도한 녀석인데, 가난하고 비좁은 집에 와서 천대받고 있다. 바실리에 가방 대신 내 몸뚱이를 얹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2010년 5월 21일 금요일

10년

* 10년 뒤면 나는 50을 눈 앞에 둔 빼도박도 못하는 중년남. 그러고보니 지금도 뭐...중년남이지만...올해 선거판을 보니, 진보신당의 10년이 고난의 행군이 될 것 같다. 내가 아니더라도 그런 말 할 사람도 많고, 내가 한 마디 더 보탠다고 머 의미 있는 발언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이 절망적인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좀 절망적이라도, 비관적이라도 오래도록 지속시킬 수 있는 믿음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에서 진보의 역사는 그냥 잔혹하기 그지없다. 누구 말마따나 잔혹사다. 멀리서 바라보면 인간의 합리나, 의지가 거의 전혀 개입하지 않은 그냥 자연의 흐름 그 자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어찌보면, 인간의 생물학적 연대기, 세대의 흐름, 동물의 생몰처럼 역사에 인간의 의지가 개입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잔혹하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 내 글쓰기는 그냥 개똥철학과 논리 사이에서 하염없이 왔다갔다 한다. 이 블로를 링크한 분들이 있던데, 걍 지워버리시길 권한다. 경청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엄밀한 논리도 없고 뭐 그렇다고, 뛰어난 직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책을 읽으시라.

 

* 노무현 대통령 선거 때도 나는 민노당을 찍었더랬다. 지금 생각하면 노무현 전대통령이야말로 '선거 혁명'이라고 말할 만한 유일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또한 '선거 혁명'이라는 말이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그것은 선거 혁명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선거가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만큼 모순이 없다. 세상의 어떤 선거도 혁명적일 수는 없다. 혁명이야말로, 선거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이루어내는 일이 아닌가.

 

 건담을 보면 '선거 혁명'이라는 말이 얼마나 수사에 가까운가를 잘 알 수 있다. 모빌수트를 타고 우주를 누비며 섬광을 뿜어내는 화려한 전장은 그러나, 커다란 전쟁의 일부일 뿐이다. 모빌수트가 아무리 진보해도, 그것이 전쟁의 의미나 승패 자체에 큰 영향을 줄 수는 없다. 그것이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순간부터, 리얼로봇 애니메이션의 품격이 떨어진다. 막, 지구로 낙하하는 거대한 운석 기지를 막는다던가...하는...

2010년 5월 18일 화요일

바바렐라 오프닝-제인 폰다

새벽 두 시의 글쓰기

* 대략 열두시 전에 시작한 운동이 끝나고, 땀범벅이 된 몸으로 우유마시고, 담배 하나 피우고, 샤워 때리고 나면 이 시간이 된다. 새벽 두시. 비좁은 베란다에서 내다보면 동네가 다 지쳐서 조용하다. 지나치게 부지런한 하루였다.

 

* 서정주는 '가난은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런 말은 할 수가 없다. 서정주의 저 말은 나에게 거의 금지된 문장에 가깝다. 금지는 언제나 갈등이 존재했던 자리라는 점에서 저 말은 나한테 갈등으로 되돌아 가게 만든다. 나한테 가난은 남루 이상이다. 부정적인 의미든, 긍정적인 의미든....서정주의 저 문장은 욕망 그 자체를 부인하는 도착이라고 생각한다. 도착이라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예술은 증상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증상을 산다. 서정주의 저 말은 시적인 전문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 나갔나...

 

 예술에 있어서 지평, 혹은 비전이라는 말은 그래서 금지와 욕망이 만드는 미학적 양심과 관련된다. 미학적 양심은 금지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주체가 만들어내는 지평, 비전, 벡터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예술에 있어서 지평이나 비전이, 초월적인 타자, 초월적인 가치가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건 그냥 예술가들의 자위행위다. 만일 '가난이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신이 있다면, 그것을 쏘아 넘어뜨려야 한다는 것이 내 미학적 양심의 요지다.

 

* 낭만주의의 전제는, 양식을 거부하고 개인의 내면을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아니라, 표현이 곧 내면에 밀착해 있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더 말하면 양식이 존재하는 이전의 형식주의 시대에는 '내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낭만주의는 내면을 외재화하면서, 즉 내면을 주체로부터 소외시키면서 발생한 것이다. 낭만주의가 중앙집권국가의 탄생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국가가 각 개인들을 개별적으로 호명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탈주술화시켰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등장하기 시작하는 페티시즘은 이와 같은 인간의 탈주술화-탈물신화와 물건으로 옮아가기 시작한 물신화와 관계가 깊다.

 

 나는 대학 내 운동권에 고질적으로 등장하는 혁명적 낭만주의(그들은 혁명론자가 아니다)는 20대들의 성장 지체와 관계가 깊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춘기라는 것이 단순히 신체적 변화를 떠나, 국가-개인 혹은, 사회-개인의 호명이 신체로 귀속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사춘기를 통해 사회적 주체로 호명되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나는 많은 이들이 겨우 대학에 들어와서야 사춘기를 겪는다고 생각한다는...

2010년 5월 17일 월요일

2010년 5월 16일 일요일

널 보고 있으면

* 강산에 노래.

 

* 서울역에 노숙자가 있다고 하자. 구원은 그를 삶의 결단으로 이끄는 일이지만, 연대는 노숙자에게도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사회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그가 노숙자가 되기까지 더 많은 안전망이 작동하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그 노숙자의 인격이나 믿음과 상관없이 말이다

 

 단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모든 이들과 연대하는 것보다 덜 가치 있거나, 더 손쉬운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머 말도 안되고, 근거도 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연대하거나, 아니면 단 한 사람만을 구원할 수 있거나...이 두가지 선택지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모두를 구원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예수는 묵시문학의 비유를 통해 각 개별자들을 실존적 결단으로 이끌려고 했다. 모두를 대속해 십자가에 매달린 일은 그의 의지를 넘어선 사건이었다.... 나는 단 한 사람의 구원은 다른 이들과의 연대에 값한다고 생각한다.

 

 시몬느 베이유는 옷을 참 못입었는데, 보봐르가 베이유를 만난 자리에서 참 옷을 못입는다고 그랬다고 한다. 보봐르의 인격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베이유는 그 글이든, 인생이든 참으로 성스러운 삶을 살다가 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그는 반동이었다. 파스칼이 그랬고, 우치무라 간조가 그랬다. 보봐르의 인격이 훌륭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베이유보다 진보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민중신학의 쇠퇴는 단순히 남한 교회의 부패 때문만은 아니다. 연대에 대한 신념과 구원에 대한 믿음,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할 수 있을까, 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이 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0년 5월 13일 목요일

주화입마

* 책 읽기를 멈추면 주화입마.....하게 된다. 내가 책을 읽는 건, 내가 나로 끊임없이 환원되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다. 그래서 주화입마가 뭐냐하면, 내가 타자와 나 사이의 차이를 통해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의 자기 확인을 반복하는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기획이다. 내가 나를 추인하고, 금지하고....내가 나를 북치고 장구치는 일이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체가 구성하는 '나'가 어떤 이유에선지 주체가 호명할 수 없는 곳에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엉뚱한 곳에 구성된 '나'는 주체가 스스로를 외상과 격리시키기 위해 구성한 '나'이다. 주체는 이 '나'가 주체가 아닌, 외상이 구성했다는 논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주체와의 연결고리가 없다는 알리바이들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그러니까, 관계없음을 증명할 증거를 만든다는 것인데....

 

* 뱀파이어는 거울에 보이지 않는다. 거울상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것은 '자아 이상'의 단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뱀파이어는 '자아'를 구성하지 않는 주체다. 당연히 자아를 갖지 않는 주체는 상징 질서에 편입할 방법이 없으며, 타자와의 차이를 생산해낼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고유성이 아니라, 무한 반복되는 자기 동일성의 지옥이다. 결국 성적 주체의 공포란 본질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성적 환타지의 뒷면. 라캉의 성관계란 없다,는 선언은 뱀파이어들을 햇빛에 내놓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봐도 훌륭한 애니 뱀파이어D에서 인간을 사랑한 뱀파이어가 햇볕에 자신을 내놓은 장면은 그래서 욜라 라캉적이다....

 

* 숭고는 실재의 도래를 가장한 것이다. 좀비를 보라.

2010년 5월 12일 수요일

숭고 III

* 리얼리티를 거머쥐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바르트가 푼크툼이라고 부르는 것. 혹은, 우발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스스로를 개방하는 것이다. 하이퍼 리얼리티는 리얼리티라고 상정된 것을 세밀화하는 방법으로, 리얼리티로부터 달아난다. 실재가 도래하는 통로를 이미지로, 스크린으로 겹겹이 필터링 하는 것이고, 이미지를 완전히 통제해 우발성의 자리를 최소화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직관이란 것은 통념과 같이 인과나 논리를 무시한, 신비로운 감각이나, 초월적 이성이 아니다. 직관은 이와 같은 수많은 필터, 이미지를 걷어낸 직접성이며, 우발성을 통해 도래하는 실재를 수긍하고, 추인하는 일이다. A는 Z다. A가 B이고, B가 C이고, C가 D이고..마침내 Z가 된다는 인과의 연쇄는 저 하이퍼 리얼리티의 방법처럼, A를 향해 도래하는 Z를 방해하고, 지연시키려는 행위다. A에 Z가 도래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과가 시작된다는 것이 리얼리티가 아닐까. 우발성은 결국 Z의 도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이 Z의 도래를 도저히 막을 수 없을 때, 숭고는 A를 완전히 폐기한다....어떤 식으로 폐기하게 될까.....

2010년 5월 11일 화요일

호모루덴스는 멸종하지 않아! 않는다규!!

* 언니라는 말은 참 좋다. 아큐라 언니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5월호에 올린 글이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쫌 놀려 먹었는데 ㅋ 암튼 글쟁이 데뷔작인 셈인가. ㅎㅎ

 

 

호모루덴스는 멸종하지 않아

-놀이네트(놀이운동가)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하위징아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놀이, 놀이라는 바탕 위에 인간의 문명이 세워졌다. 1938년 출판된 <호모루덴스>에 이러한 통찰이 담겨 있다. 그러나 통념상 놀이는 문화의 하위 영역이다. 개인의 삶에서 노동 또는 학업과 휴식 사이에 겨우 존재하며, 재미는 있지만 별다른 목적과 가치가 없는 활동이 바로 놀이다. 통념은 힘이 세며 일정한 진실을 반영한다. 우리는 재미없이 살고 있으며 우리 삶은, 놀이가 그러하듯, 어떤 목적을 위하지 아니한다. 놀이는 매우 자명하며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활동이지만, 아직은 인간의 언어로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복잡한 과정과 원리를 가진 실체다. 놀이는 에브리싱(Everything)인 동시에 낫싱(Nothing)인 그 무엇이며, 일상 속 복잡계이다. 놀이라면 당연히 전래놀이라는 선명한 전제에서 논의를 시작하면 선명하지 않은 현실과 부합하기 어렵다. 극단의 여러 관점을 동시에 긍정해야 한다.

 

 

 

 

과연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놀지 않는가? 답은 만만치 않다. 놀이란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우선 놀이는 자유일 수 있다. 놀이의 반대는억압이 된다. 우리 아이들은 오직 공부할 자유만 있어 내전 중인 나라나 극히 빈곤한 나라의 아이들만큼 심각한놀이실조상태다. 놀이를 성인기의 준비로 보는 관점도 있다. ‘어려서 놀며 기른 힘으로세상의 벽과 사회에서 받을 상처를 넘거나 치유하게 된다. 그렇다면 산과 들, 골목에서 뛰노는 것도 놀이요, 공부나 독서도 놀이가 된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아이들은 모두 365 24시간 중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놀이를 한 셈이다. 대신 농경사회, 수렵사회, 산업사회, 후기산업사회 등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시대와 사회가 달라지면 놀이도 달라진다.

 

그렇다고 현재 아이들이 미래를 대비해 잘 놀며 잘 살고 있다고 보는 한국인은 없다. 최근 서울시 초등학교 중 일부가 휴식시간을 10분에서 5분으로 줄였고, 점심시간을 줄여 하교시간을 앞당겼다. 학원에 가든 방과 후 학교에 남든 아이의 학습시간을 하루 30분이라도 더 늘려주어야겠다는갸륵한교장이 그리 많은 것이다. 그 정도는 약과다. 전국의 초등학교가 수학과 영어 교과 시수는 늘리고 체육 교과 시수는 줄인다. 후기 산업사회를 살아갈 인재들은 체력이 약해도 된다는 깊은 뜻이다. 이 깊고 갸륵한 뜻을 이해 못한 네티즌이 수천, 수백의 댓글로 비난을 퍼부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초등학생들이 지금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데, 아이들에게 더 많은 자유가 필요하다는 쪽이 다수인 듯하다. 그러나 2008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돌이켜보면 경쟁교육을 강조하는 보수 진영 후보들이 얻은 표가 진보 진영보다 훨씬 많았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현실에 영향을 줄 논의를 하려면 이러한 현실을 냉철하게 보아야 한다. 현재 어린이들의 삶이 안쓰럽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아이들을 위해 약간이라도 성가신 일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많은 시험을 보면서 더욱 학업에 힘써야 한다고 나서서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이들이 정작 세상을 조몰락댄다. 어느 쪽을 향해서든 놀이는 밥이고, ‘놀이밥을 굶다 보면 아이들이 멸종한다고 다그쳐선 곤란하다.

 

우선 효용이 없다. ‘아이들의 멸종’, ‘참극’, ‘전쟁등 묵시론적 언어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변화를 주긴커녕 반감만 준다. 당위를 강조하는 말이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는 없다. 두 번째로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현재 20대 문화를 보면 과거 어떤 세대보다 유희성이 강하다. 이들 역시 어려서놀이밥을 굶어가며 매일 전쟁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다면 이들이 보낸멸종된 아이시대와 20대 문화의 유희성은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가? 호모루덴스의 아이들은 결코 멸종하지 않는다. 놀이는 인간의 본질이기에 아이들은 어떻게든 놀이하기 마련이다.

 

아이들이 게임을 많이 하는 것이 문제일까? 엄밀히 말해서 게임이 약간의 문제를 일으키지만 사람이 망가지기는 쉽지 않다. 놀이는 재미있고 몰입이 가능한 활동이다. 놀이에 우열은 없지만 재미로 따지자면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며 다양한 서사와 음향, 화면으로 몰입도를 높인 전자매체 놀이를 넘어설 옛 놀이는 없다. 게다가 놀이와 사회는 조응한다. 하나의 사회구조는 어떤 특성을 가진 놀이를 낳으며, 사람들의 생활감정과 생활공간에 맞는 놀이가 널리 퍼진다. 전자매체 놀이는 현대사회와 긴밀히 조응한다. 적을 궤멸하든, 공주를 구하든 뭔가 임무가 주어진다. 임무 수행 중 모험을 하면서 역할을 담당한다. 게임이 진행되면서 성과가 누적되면 레벨이 오른다. 레벨이란 노골적인 순위 매기기다. 비교가 이보다 간명해지긴 어렵다. 이러한 게임 구조는 현대인의 삶 구조와 거울상처럼 맞아떨어진다. 개인적으로 안타깝지만 이것이 놀이의 시대성이다.

 

문제는 전자매체 놀이 말고는 옵션이 없는 현실이다. 아이들이 잘 뛰놀지 못하는 현실도 문제다. 그러나 아이들이 뛰놀 수 없게 하는 여러 겹의 구조가 우리 모두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진짜 문제다. 1980년대 초반의 과외 금지를 지금 시행한다면, 대졸자를 가장 많이 흡수하는 영역은 바로 수험산업이므로, 당장 굶어야 할 사람이 부지기수다. 현실은 복잡하며 강고하다. 무작정 모여서 재미있게 노는 일이 그냥 일어날 리 없다. 또한 여러 사람이 모여 몸을 움직여 노는 놀이가 다 같지 않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도록 여러 조건을 세팅하는 것이다.

 

그 조건에 다음 내용이 들어갈 것이다. 하나, 어린이 놀이운동을 할 주체, 플레이 리더가 계속 재생산되는 사회적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자본제와의 싸움은 20~30년으로 끝나지 않는다. 플레이 리더가 수십, 수백 명이 되면 수백, 수천의 대안이 생길 것이다. , 어떤 놀이가 어째서 아직 대도시 아이들의 일상 속에 살아남았는지 따져야 한다. 현대인에게서 신명과 흥의 원초적 정서를 일으키는 생명력이 넘치는 놀이의 유전자를 찾아야 한다. , 이런 놀이를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함께 나눌지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 모델은 이 시대의 평범한 부모들의 욕망을 매혹해야만 작동할 수 있다

2010년 5월 9일 일요일

2010년 5월 5일 수요일

4천원 인생

* 논픽션은 그 현장성 때문에, 더 자유롭다. 논픽션은 좀 더 감상적이 되어도 리얼하고, 좀 더 선동적이 되어도 리얼하다. 논픽션은 감상성이 리얼리즘을 좀먹지 않는 장르다. 현장은 우리가 리얼리스틱하다고 말하는 것들보다 훨씬 더 리얼하기 때문이다. 논픽션은 탐욕적으로 세밀할 필요가 없다. 논픽션은 스냅샷처럼 우발성을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21에서 진행되었던 노동 OTL 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4천원 인생이라는 책인데, 마트에서, 식당 아줌마들과, 이주 노동자의 옆에서 함께 먹고 자며 태어난 현장 보고들이다. 물론, 체험 삶의 현장처럼 머 땀의 소중함을....어쩌구 이런 내용은 아니다.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의 현장이다. 고은의 만인보 따위는 이 논픽션에 비하면, 리얼리스틱-엔터테인먼트...

 

 

숭고 II

* 어머니는 남근을 소유하고 있다, 아니다, 어미니에게 남근은 없다, 아버지가 남근을 소유하고 있다, 아니다, 아버지는 남근을 결여하고 있다. 남근은 미끄러져 나가면서, 기표의 연쇄를 만든다. 때문에 남근은 언제나 결여된 존재다. 그것은 상징을 만들어내는 텅 빈 무엇이다. 그것은 결코 신체/주체로 귀속되지 않는 문장과 같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말한다고 적는다...

 

 문장은 그 문장이 최종적으로 귀속되는 주체를 감출 때에만 완결된다. 영원히 미끄러지는 주체, 탈주하는 주체를 불러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문장의 중간을 잘라내고, 못박고, 주체의 흔적을 잠시 거머쥔다. 나는 남근이다, 나는 남근이 아니다, 나는 남근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나는 남근을 가지고 싶다, 너는 가질 수 없다, 내가 네 아버지다. 이 금지를 통하지 않고는 너는 남근을 추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상징에 몸담을 때에만, 그것이 가능하다. 잠시마나, 네 주체의 미끄러짐을 멈추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상징 질서들이다.

 

* 다시 말해보자. 생략된 것들이 있다. 나는 어머니의 남근이다. 아니다. 나는 어머니의 남근이 되고 싶다... 내가 남근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은, 내가 남근이 되고 싶다는 욕망의 불가능성을 통해 도달한 곳이다. 나는 남근이 되고 싶다. 불가능하다. 나는 남근을 소유하고 싶다.....

 

 그런데, 숭고는 내가 남근을 소유하고 싶다, 가 아니라, 내가 남근이 되고 싶다, 의 욕망이 불러낸 어떤 것이다. 숭고의 영역에서 아버지는 남근을 소유하거나, 결여한 자가 아니라, 남근 그 자체이다. 아니, 나는 아버지가 남근 그 자체이기를 원한다. 때문에 아버지 기표가 대표하는 타자성이 유실된다. 숭고는 타자의 자기 동일성을 유실시킨다. 타자의 타자됨, 즉 타자성은 나, 주체가 아니라, 타자의 타자에게로 떠넘겨진다. 주체가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영원히 탈주한다.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그 미끄러짐을 잠시 못박는 기표가 된다. 내가 곧 금지다.

2010년 5월 2일 일요일

숭고

* 숭고는 실재의 도래를 흉내내는 행위다. 외상적 실재의 도래를 상징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행위. 그러나 숭고는 실재가 상징 질서 안으로 편입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숭고에 있어서 '흉내'는 재현적 모방이 아니라, '흉내'가 실재 그 자체와 결코 동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차이를 확인하려는 행위다. 그러니까 숭고는 '타자성'이 완전히 제거된 타자다. 아니, 숭고는 타자의 '타자성'을 끝도 없이 타자의 타자에게 위임한다. 기존의 상징 질서를 추인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타자가 곧 숭고다.

 

 우리가 사랑의 어떤 순간, 어떻게 보면 가장 부정적인 사랑의 순간, 사랑이 오로지 나라는 주체에 귀속되는 순간, 사랑이 나라는 환원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절망의 순간에 그래서, 숭고가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숭고의 영원한 위임장을 만들어봤자, 결국 실재는 그가 도래할 신체로 귀속된다...........그 위임장이 권위를 상실하는 순간, 혹은 그 위임장이 마침내 신체에 도달하고 마는 순간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전쟁터의 종군 신부, 종군 목사들이야말로 숭고한 존재다. 그들이 없다면 신체는 좀비가 될 거다. 숭고와 실재 사이를 헤매는..

2010년 4월 30일 금요일

이빨도 안들어가는 시

* 오선생님이라고, 나한테 선생이 하나 있었는데, 뭐 술 좋아하고, 도박 좋아하고, 돈도 좀 좋아하고, 시도 좋아하고...시 선생이었다. 아무튼 어느날 오선생 왈, 내가 쓰는 시는 너무 딱딱하다는 거다. 이빨도 안들어가는 시. 이빨도 안들어가는 시라니..거 참, 맞는 말씀이다.....시를 좋아하고, 시만 읽어가지고는 시인이 될 수 없나니...

 

* 지하철에서 시집을 꺼내 읽으면 참 부끄럽다. 회사에서도 그렇고....미국식으로 부끄럽다..... 캄캄한 밤에 조용히 시집을 꺼냈다가, 에라이...하고 욕나오는 시집들은, 좀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된다. 그 밤에 혼자 조용히 깨어나서, 시집에 대고 욕하는 사람의 심정을 시인들은 좀 알아야 된다.

 

* 시쓰는 일은 별 게 없다. 내가 아주아주 나약하고, 비겁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는 일부터다. 좀 더 나아가면 내가 아주 나약하고, 비겁하다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는 순간, 시는 굳이 말걸지 않아도 커뮤니케이션 이상의 무엇이 된다.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는가...그런데 어쩔 수가 없다. 시가 그렇다. 약한 사람이 시를 쓰고, 한없이 약한 사람들의 곁에 남는 게 시다. 사회적 약자..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무지무지 강해져야 하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 외엔 더 방법이 없는 사회에서 시를 쓴다는 건, 그 많은 사람들 대신 나약하다고 말하고, 그 나약함을 보존하는 일이다. 나약한 것도 살아남 게 하는 게, 그런 게 시의 이념이라고 알고 있다.

 

* 요즘 젊은 친구들은 요만큼도 약점을 보이려고 하지를 않는다. 때로 작은 흠은 그 사람의 매력이 되기도 하고, 인간적인 모습이 되기도 하는데,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밀어붙이면서 살아왔기 때문인지, 자신의 나약함을 내보이는 일이 없다. 설사 조금 그런 모습을 들키게  되면 너무 심각하게 반응한다. 뭐 조직에서는 좋아하는 인간형이기는 하다만, 나처럼 농담에서 농담으로 끝나는 인간과는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당혹스러워 한다.

 

 쿤데라의 농담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조금만 약해보이면 여기저기서 물어뜯으러 달려들기 때문일까. 도저히 내가 약하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든는 사회, 자신의 나약함을 말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아무도 자기 성찰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것두 좀 훈련이 필요하다. 칭얼거림이 완전히 사라진 사회. 오선생 말대로, 거 참 이빨도 안들어가는 사회....그런 느낌이다...

2010년 4월 29일 목요일

가치의 연대

* 뭐 이제 다 지난 말이 되어버렸지만, 진보신당이 반 mb 연합에 대해서, 가치의 연대라는 말을 들고 나온 것에 대해서, 나는 참 마음에 안든다. 정책 연대라는 말의 연장선상에서 쓰이긴 했지만, 가치의 연대라는 말은 좀 생각해봐야 할 수사다.

 

 가치의 연대라는 말은 가치에 대한 공유 없이 이루어지는 전략적 이합집산은 그져 선거용이라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겠지만, 나는 가치의 연대라는 이 말이 진보신당의 어떤 무기력을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가치의 연대라는 말이, 진보신당 내에 도사리고 있는, 지나친 정치적 관대함이나, 몰계급성, 노동 중심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자기 정체성을 폭로하고 있는 말은 아닌지, 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혹시 생태주의자와 페미니스트들과 자유주의적 관점들을 마냥 한없이 포괄하고 있는 진보신당의 무지개 스탠스가 '가치 연대'라는 말을 탄생시킨 원인은 아닐까. 혹시 가치 연대라는 말이 닳고 닳은 정치 공학과 엄밀한 정치적 입장 사이의 어중간한 어디쯤을 가리키는 진보신당의 자기 변명은 아닐까.

 

 나는 어떤 계급, 어떤 목소리 없는 자들을 대신해 정치적 지분을 쟁취하기 위해 태어난 대중정당에게 '가치의 연대'라는 말은 너무나 추상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 가치의 연대라니, 이건 부르조아들의 슬로건에 가깝지 않나. 부르조아의 정치 논리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부르조아의 정치 논리에는, 그 주체가 완전히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서민을 살리겠다,는 부르조아 정당들의 슬로건에는 '누가' 서민을 살리겠다는 말인지가 철저하게 감춰져 있다. 서민들이 직접 서민을 살리도록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부르조아들이 서민들을 살리겠다는 것도 아니다. 부르조아는 정치적 입장을 갖지 않아도, 다만 정치 공학을 열심히 수행하면, 부르조아지의 이익에 완전히 부합하는 정치적 결과물들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조아지는 정치적 입장을 내세우지 않아도, 그들이 끊임없이 재생산해내고 확산시키는 이데올로기-가치를 통해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진보신당이 끝내 끝까지 정책을 통해 싸워야 하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지배세력들이 만들어놓은 가치의 위계를 깨부수기 위해서는 첨예한 정책을 통한 갈등의 생산 밖에 없지 않을까. 진보신당은 안으로도, 밖으로도 미친듯이 갈등을 생산하는 정당이어야 하지 않을까. 가치의 연대라는 말이 곧바로 정책적 연대라는 말로 연결되어버리는 진보신당의 무기력한 정치적 상상력이 나는 실망스럽다. 아니 좌파들이 '가치'를 슬로건으로 내건다는 게 말이나 돼? 아니 좌파들이 생태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과 갈등이 아니라 '내외'하면서 산다는 게 말이나 되나...뭐 씨발 사귈거야?

 

 

2010년 4월 27일 화요일

바비킴 망했네..

* 바비킴 새로 올라온 노래 들었는데, 망했다. 뭐하자는 건가.

 

* 제프브리지스가 크레이지 하트에서 늙은 컨츄리 가수 역할을 했다. 제프브리지스도 좋아하고, 카우보이 모자도 좋아하고, 이런 블루스 풍의 컨츄리도 좋아해서, 아주 재미있게 봤다. 제프 브리지스가 부릅니다. brand new angel

 


6

정치적 예수...

* 예수의 목숨을 원한 것은 빌라도가 아니라, 군중들이었다. 그 사실을 잊으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그들의 '선처'를 요청한 사실이 망각된다. 십자가가 정치범들을 처형하던 방식이라는 사실에 매달려 예수를 '정치범'으로 한정하면, 아주 아주 과학적으로 생각해도 역사적 예수가, 정치적 예수에 의해 왜곡되는 일이 벌어진다.

  예수를 크던 작던 어떤 범주를 통해 설명하는 방식은 일종의 소거법일텐데, 소거법을 하려면 정치적 열정이나, 영성이 아니라, 존재의 불안을 댓가로 한 전적인 '의심' 이외에 방법이 없다. 바르트처럼 초월론으로의 복귀를 통한 변증신학이 있는가, 하면 폴틸리히 같은 이들의 고통스러운 의심과 불안에 철저한 변증신학이 있었다. B급 좌파 아저씨는 .......

  실존적으로 보면, 이 의심의 철저를 통한 신앙의 길은 소거법의 길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야스퍼스가 그랬고, 키에르케고르가 그랬고, 틸리히가 조직신학을 만들어낸 길 또한 그랬다.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라는 개념은 엄청난 적들을 만들어냈고......

  예수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적극적이기 전에, 철저한 의심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일이다. 정치적 입장이나, 윤리를 신앙에 적용시키는 일은 열정을 의심으로 전환시키기를 요구한다. 좌파가 예수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좌파가 예수를 철저하게 의심하는 일 이외에 다른 방법일 수 없다. 그 철저한 의심을 통하지 않고는 좌파는 어떤 영성에도 도달할 수 없다. 없어야 옳다. 예수를 정치적으로 해석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 오만이야말로 빌라도가 예수를 보는 시각과 얼마나 닮아 있는가. 예전에 나랑 같이 일하던 어떤 아저씨가 예수는 미국 사람 아니냐, 고 했던 적이 있는데, 하하하 차라리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이야기냐. 좌파는 예수가 왜 어떻게 미국 사람이 아닌지를 말해줘야지, 예수는 유대인이라고 대답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응?

2010년 8월 31일 화요일

기록

* 그저께 열두시까지 술먹음. 어제는 아, 그러고보니 어제도 딱 열두시 정도까지 술먹음. 온 몸에 맹렬한 알콜 알러지. 두드러기. 술먹으면서, 술주정뱅이들의 한심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너무 한심해서 어제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계란 까먹으며 일종의 자기 징벌적 운동을 강행. 푸쉬업 일곱세트, 윗몸일으키기 두 세트, 덤벨 4세트, 턱걸이 15개. 턱걸이 열라 힘듦. 몸무게는 무려 87.6 키로그램. 근육을 키워도 체중이 늘어나면서 턱걸이 갯수가 정말이지 무지하게 줄어들었음을 다시 한번 실감. 새벽 네 시에 잠듦. 미친듯이 가려웠지만, 안긁고 꿋꿋하게.....여덟시 반에 기상. 출근. 졸리네.

2010년 8월 28일 토요일

예술, 독창성에 대한 편견

* 예술이 독창적이거나, 독창적인 것이 예술의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건 반만 맞는 명제다. 역사상 어떤 예술도 오로지 독창적이기 때문에 예술인 경우는 없었다. 예술은 언제나 인정투쟁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에 더 가까웠다. 예술적 독창성이란 언제나 승인된 독창성, 공유되거나 합의된 독창성이었다. 글쓰기의 함정은 바로 여기 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거나, 글이 '안나오는' 벽에 부딪쳤을 때, 독창적인 아이디어, 예술적 영감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오해다. 독창성에 함몰된 예술의 자기 정의는 내 식으로 이야기하면 금태환제 시대의 이야기다. 내 농담을 더 진전시키면 최근 들어 이처럼 먼 옛날의 담론이 다시 회귀하는 이유는 저성장, 고실업 시대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케인즈가 저성장, 고실업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 신고전파 이전 노동가치론의 전제를 빌려오는 행위와 비슷한 패턴이다. 하하하. 예술의 독창성이 강조되고, 창궐하는 것은 부르조아 예술의 위기가 도래하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 사실, 예술의 독창성은 더 과학적으로 말하면 호환불가능성이다. 그런데, 이 호환불가능성은 예술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블로그 포스팅의 댓글들은 포스팅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지만, 포스팅의 의미를 확대하고, 재생산한다. 댓글이 더 많이 달리면 달릴수록 해당 포스트는 더 많은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한다. 포스팅은 복사할 수 있지만, 그 반응까지 재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뭐 대충 그렇게 생각하면, 예술의 호환불가능성은 바로 그와 같은 피드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김현은 '길항'이라는 개념이 문학 작품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으로 봤지만, '길항'은 현상으로써 작품, 문학이라는 사건 자체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 하루키나, 대중 문학에 대한 남조선 문단의 배타적인 태도와 한편으로 순문학에 대한 상업적인 비평들은 바로 이 '길항'이 문학에 내재해 있다는 지극히 '우파'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2010년 8월 22일 일요일

올 것이 왔네

* 결국 회사에서 팀장 자리를 내놓고 말았다. 너무 놀았다. 일년 내내 지각하고, 숨어서 자고, 땡땡이 치고....근데 내가 밀려난 이유는 그것 때문은 아니고, 워낙 새로운 대표가 나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역시 회사 생활에서 성공하는 건 성실한 것과 별개의 문제라는 거지. 나도 웬만하면 비위 맞춰주고 싶었는데, 정말 도저히 못하겠는 걸 어쩌리.

 객관적으로는 누가 봐도 내 잘못이긴 한데, 그래도 막상 닥치니 억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편하기도 하고...본질적으로는 나는 리더 같은 건 안된다는 거다. 그냥 독고다이가 젤로 맘이 편하긴 하다만....내가 회사에 들어가 8년이나 일하다니, 그것부터 기적이다. 머 암튼 널널한 회사 덕분에 널널하게 잘 다녔더랬다. 에효.....딴 데 가서 또 면접 보고 그짓을 다시 어찌 하나. 귀찮구나. 이 기회에 좀 놀았으면 좋겠지만 쩝. 아니 근데, 도대체 날 뭘 보고 팀장을 시켰는지 이해는 안가 여전히. 뭔가 내 한 시절이 또 이렇게 저문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나의 사회적 변화는 나의 시심을 무지 자극시키누나.

 

2010년 8월 18일 수요일

비밀

* 새벽 두시, 새벽 세 시가 되면 신림동 농구 코트 옆 잠시 지상으로 올라온 지하철 선로를 통해 노란 보선 작업차가 간다. 선로반원들을 싣고 말이지. 지상으로 올라온 김에 잠시 내려서 선로 여기저기를 살피는 척 좀 쉬기도 하고. 나는 이 세상이 어떤 기계이고, 우리가 까무룩 잠든 사이에 저런 튼튼한 기술자들이 구부러진 곳을 두드려 펴고, 기름을 칠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내가 그런 세상의 비밀 한 가지를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굿 나잇.

 

 

 

2010년 8월 17일 화요일

dancing in the moonlight

* 나는야, 이런 음악이 좋다.

2010년 8월 14일 토요일

혁명

* 똥이 되든, 밥이 되든 혁명 한번 했으면 좋겠다. 진짜 똥이 되든 밥이 되든. 대한민국은 너무 숨막히는 곳이다. 좃같은 씨발 대한민국. 가끔 잊고 살다가도 눈을 들어 보면, 욕만 나온다. 그래, 가끔 하늘을 보면 분노가 증오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다. 이어폰으로, 음악으로 세상의 소리로부터 멀어지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2010년 8월 4일 수요일

코끼리가 차지한 세계

* 방 안에, 몸 안에, 주머니 속에, 머릿 속에 코끼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때까지 코끼리는 만질 수는 있지만,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지나지 않습니다. 코끼리를 어떻게 격리할 것인가, 혹은 코끼리의 생태계와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 혹은 코끼리를 어디에 감춰둘 것인가, 하고 머리를 굴려봅니다. 코끼리는 불어나지 않지만, 코끼리에 대한 질문들만 불어나 둑을 넘습니다. 결국 우리는 가난하게도, 그 질문들을 막는 데 급급할 수 있을 뿐입니다. 결국 코끼리가 사라지고 코끼리에 대한 질문만 남아 있는 세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은 코끼리를 살해하고, 간신히 그 질문만 떠도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코끼리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장님에, 거짓말쟁이입니다. 코끼리는 어디로 갔나요? 가장 잘못된 질문이 우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코끼리가 방안에도, 몸안에도, 주머니속에도, 머릿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코끼리가 세계를 완전히 차지해버린 곳에서는 코끼리는 소속도, 섹터도, 좌표도 없이 존재합니다. 만질 필요도, 볼 필요도 없죠. 코끼리가 세계 그 자체, 아니 코끼리가 턱없이 비좁은 세계 바깥으로 삐져나옵니다. 코끼리가 예외까지 전부 다 차지해버린 세계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거짓 딜레마, 당신의 잘못된 질문을 코끼리가 부숴버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관찰자가 아니라, 목격자가 되어 증인석으로 불려 나왔습니다. 당신은 모든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으면서 동시에, 개인적 취향과 도덕, 위치와 세계관에 하등 상관없는 사실 그 자체만을 간신히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세요. 당신은 침묵하거나 대답할 수 있을 뿐입니다.

 

  고통은 예외가 존재할 때에 가능합니다.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고 믿을 때, 고통이 존재하는 것이죠. 고통이 전부인 세상에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코끼리가 전부인 세상이 당신을 목격자로 세우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은 거기 동참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코끼리가 차지해버린 세계, 코끼리로 가득찬 사건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당신에겐 인력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아무 질량도 없는 좌표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문장이 당신이 독자로 존재할 수 있는 여지를 박탈한다면, 당신은 목격자가 되거나,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세요.

2010년 7월 30일 금요일

데니스 루헤인과 스타크2

* 이틀 동안 회사에서 틈틈이, 꼬박 꼬박 시간을 내어 스타2 캠페인 26개를 모두 클리어했다. 그리고 나서는? 스타크를 다 지웠다. 스타크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건 데니스 루? 르? 헤인. 켄지& 제나로 라는 탐정들이 나오는 하드보일드 소설이다. 완전 재밌네. 무엇보다 평소 나의 지론이랄 수 있는 '예술은 동네를 벗어나는 법이 없다'는 정언명령을 잘 보여주는 소설들이다. 연쇄 살인마도, 마피아도, 소아성애자도, 마약쟁이도, 경찰도, 전부 다 동네에 사는 거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올 여름은 루? 르? 헤인과 함께 날 것 같다.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를 먼저 읽었는데, 밤을 꼬박 샜다. 무지 재밌네. 레이먼드 챈들러 이후 하드보일드에 빠진 것은 또 오랫만이다.

 

 

2010년 7월 25일 일요일

바울

* 바울은 나에게 교회를 통하거나, 성경을 통하거나, 혹은 역사적 기독교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예수에 이를 수 없다는 절망을 보여준다. 더 절망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이해하거나 믿고 있는 예수는 우리가 그에게 도달할 수 없는 절망 안에서만 온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재차 확인해주는 존재에 가깝다. 신앙은 이처럼, 끝내 예수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절망이, 우리가 그를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기만적 가능성을 압도할 때에만 나에게 도래한다.

  바울은 꼭 예수가 고향에서 배척당했듯이, 유대인 공동체의 편협한(?) 신앙과 완고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집단 윤리를 포기하고 이를 로마의 종교, 보편의 신앙으로 전환시켰다. 보편성, 로고스...베버가 이성 종교라고 부른 기독교의 특징적 철학은 이 전환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공관복음들이 오히려 바울의 서신들과 행적을 기록한 복음들보다 역사적으로 후대 혹은 비슷한 시기에 기록, 편집되었다는 사실은 바울이 기독교 역사에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바울을 통해 예수를 재현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바울은 신앙이라는 것이 가지는 보편을 발굴해내기 위해서, 유대 공동체의 도덕으로부터 예수의 케리그마를 분리시켜 내었다. 그가 기독교 박해라는 퇴행적 정치를 거듭하던, 네로의 로마로 돌아간 것은 신앙인으로써의 결단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던 네로 이전의 로마, 시민적 공공성, 보편성으로써의 신앙을 승인하라는 요구로 작동했다....고 생각한다.

 

* 사실 신앙이란 것의 강력함, 밀도는 그 근거들의 허약함을 보완하려는 성질로부터 태어난다. 종교적 히스테리란 말은 그래서 신앙의 어떤 지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거다....

 

* 근데 사실 이미 바울 이전에 대대적인 이주 정책으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은 로마가 지배하던 여기 저기로 많이들 옮겨가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도들도 좀 예외적이긴 했지만, 종교적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는 인정받고 있었다. 그니까, 무슨 바울이 레지스탕스처럼 신앙공동체를 위해...머 이건 좀 과장이다. 네로가 등장하고 나서 최후의 순간에 목숨을 걸고 로마로....머 이건 거의 사실인 것 같지만..

 

* 글쓰기가 꿈꾸는 것은 무엇일까. 오히려 재현 아닐까. 재현이 이루어지는 순간 글쓰기는 멈추는 것이 아닐까. 재현 불가능성이 커질수록, 글쓰기가 활발해지는 게 아닐까.....마치 신앙처럼......

 

* 아무튼 나는 별 보고 싶은 책이 없을 때는 대개, 성경 비스무레한 것들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나한테는 신앙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자본주의적 욕망이 극단적으로 낮은 나 같은 사람은 히스테리나 강박증이 좀 필요하다는 거다.

2010년 7월 6일 화요일

리얼리티

* 한국에는 노동계급의 삶을 묘사하는 문학도, 방법도 더 이상 없다. 리얼리티는 엄연히 존재하는 노동계급을 상상해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 그렇다면, 상상하자!!

2010년 6월 26일 토요일

에드워드 양 / 청소년의 전화

*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었다. 죽은 사람이다. 난 인간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 아니 나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만 한편 그가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나는 그의 영화들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들은 유한한 한 인간의 자장에서 벗어나고, 또 죽음은 그가 자신의 영화들을 더 이상 망칠 수 없게 만드니까. 죽기 전에 그는 무슨 애니메이션인가를 만들고자 한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뭐야 그게. 그의 영화들은 참 멋졌댔다. 자살한 록스타를 좋아하듯이 에드워드 양을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좀 곤란하긴 한데, 나는 그가 참 좋았고 좀 곤란했다.

 

* 청소년의 전화, 여성의 전화, 생명의 전화, 사랑의 전화......뭐 하는 사람들 일까. 성격이 삐뚤어져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병신 같애.

2010년 6월 20일 일요일

연애의 목적 2

* 연애의 목적의 해피엔딩은, 강혜정이 다시 박해일을 찾아간 시점이 아니라, 강혜정이 돌변해서 박해일을 고발하는 지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강혜정이 피해자의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박해일을 가해자로 지목하는 순간은 강혜정이 자신의 존엄을 되찾는 순간이고, 사랑은 언제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존엄을, 어떤 방법으로든 지켜주는 일이어야 한다. 우리는 피해자를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너무 나약해서 피해자가 그 자리를 벗어나 온전해질 때에만 그를 사랑할 수 있다. 로맨스는 위로가 아니니까......

 

 강혜정이 피해자의 자리로부터 벗어나 온전해지는 단순한 방법은 스스로 가해자의 자리를 선취하는 것이다. 짐승같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해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해자로의 자기 전환에서 필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증오를 귀속시킬 수 있는 나 아닌, 다른 누구이다. 피해자가 극도로 고립된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은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쉽다는 것 역시 비인간적이지만, 자연스럽다.

 

 로맨스는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일이다. 이 엄연한 진실이 지켜지지 않으면 사랑이고 나발이고, 다 거짓말이다. 연애의 목적의 리얼리티는 그 고발의 순간에 박해일이 스스로를 피해자의 자리에 몰아넣지 않고, 희생자를 자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강혜정이 가해자의 자리를 적극적을 선취하는 순간에 있다. 피해자에 대한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 탈정치의 공간은 이와 같은 '가해자의 존엄'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가 없다. 여담이지만, 연애의 목적에 나오는 이들 중에 가장 로맨스가 필요한 존재는 '국어 선생'일 것이다. 자각증상 없는, 혹은 자각 증상을 적극적으로 지워버린 피해자는 자각증상 없는 가해자가 되기 쉬운 법이다.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네

 

홀로 버려진 길 위에서
견딜 수 없이 울고 싶은 이유를
나도 몰래 사랑하는 까닭을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왜 사랑은 이렇게 두려운지
그런데 왜 하늘은 맑고 높은지
왜 하루도 그댈 잊을 수 없는 건지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까
그냥 또 이렇게 기다리네
왜 하필 그대를 만난 걸까
이제는 나는 또 어디를 보면서 가야 할까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까
그냥 또 이렇게 기다리네
왜 하필 그대를 만난 걸까
이제는 나는 또 어디를 보면서 가야 할까

 

왜 사랑은 이렇게 두려운지
그런데 왜 하늘은 맑고 높은지
왜 하루도 그댈 잊을 수 없는 건지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밥벌이의 신성함, 밥벌이의 환멸

* 밥벌이는 치욕적이다. 밥벌이는 그러나 신성하다. 치욕적이지만, 밥벌이를 통해 생을 영위한다는 사실 자체는 엄연하고, 엄숙하다. 김훈의, 때로는 이성복의 논리들이다. 저 밥벌이의 신성함과 환멸의 이분법이 밥벌이의 정치적 함의를 휘발시킨다. 밥벌이라면 무슨 짓이든지 통용되고, 밥벌이라고 하면 무슨 일이든지 폄훼된다. 밥벌이를 위해서라면, 학살자의 용비어천가를 써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도 조금은 관대하게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밥벌이로 세상을 조금 더 나은 쪽으로 움직이는 일, 밥벌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해내는 일은 밥도 벌고, 명분도 얻으려는 순수하지 못한 행위가 된다. 밥벌이는 쾌락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부르조아들은 밥벌이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밥벌이가 아니라 쾌락원칙에 충실한 행동일 뿐이다. 그것을 재테크라고 부르고, 게임 이론으로 설명해내고자 하는 우파들의 논리를 밥벌이의 지옥에서 사는 이들이 앵무새처럼 따른다. 부르조아는 자기 쾌락을 추구하는 일이 곧 경제 활동이 된다. 밥벌이의 엄연함, 밥벌이의 치욕에서 벗어나려면 부르조아가 되는 길 밖에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밥벌이 성찰하는 이들은 없다. 어디까지나, 자아 이상에 가까운 부르조아의 자리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밥벌이를 들여다본다.

 

 밥벌이라는 치욕과 신성, 이 이분법을 부수어야 한다. 노동은 자가발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교환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자주 잊어버린다. 자수성가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말이다. 밥벌이의 치욕과 환멸의 이분법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사람들이 대개 소위 자수성가했다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의미 심장하다. 요컨대 대한민국의 압축성장은 자수성가라는 허구를 통해 노동의 교환관계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자수성가했다고 믿는 이들이야말로, 밥벌이의 치욕과 환멸, 밥벌이의 탈정치성을 앞서서 전파하는 전도사들인 이유가 여기 있다.

 

.....................부르조아에게 귀속되는 노동의 잉여를 스스로의 계급에 귀속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잉여야말로 바로 우리가 정치라고 호명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분배의 문제가 끝내 경제의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잉여가 부르조아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분배의 문제가 정치의 문제로 전환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잉여가 노동자 계급에게 돌아간다는 뜻, 바로 그것이다.

 

 

2010년 6월 13일 일요일

연애의 목적 / 오, 사랑

* 연애의 목적을 보고, 버로스의 정키,를 읽기 시작했다. 파시즘과 관련한 머...오덕짓의 계속으로 책을 하나 사고....

 

* 사랑, 더 구체적으로 연애는 교환불가능성을 더듬더듬 확인하는 일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나에게 교환불가능한 타자 바로 그것이다. 언제나 왜 h를 사랑하지 않고, m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은 비교 우위가 아닌, 교환 불가능성을 묻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인과의 허구를 폭로하는 질문이다. 인과 관계 즉 상징적 질서는 새로운 고정점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사슬을 끊고,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교환불가능한 그, 그녀가 그 미끄러짐을 멈추어 줄 때까지, 우리는 완전히 능동적으로, 수동성에 몸을 맡긴다.

 

* 히스테리증자는 이 고정점 만들기에 실패를 경험한 이들이다. 그들은 상징 질서의 인과 관계가 언제든지 미끄러질 수 있다는 불안을 살고 있다. 그들은 인과 관계의 허약함을 보완하고 싶어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압도하는 무엇을 추구한다. 니체가 '진리란 힘을 잃어버린 은유'라고 말한 뜻이 여기에 있다.

 

* 그렇다면 내가 나의 교환불가능성을 극대화하려면, 육체를 버려야 한다. 나는 완전한 추상, 육체가 없는 공기, 영혼의 결정체 같은 것이어야 한다. 육체가 없어야, 나의 교환불가능성은 완전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교환불가능성은 교환가능성을 근거로 가진 차별성이지, 초월성이나 유일성이 아니다. 그와 같은 차별성을 구체성이라고 부르자. 육체에서 출발하는 교환불가능성. 당신의 눈, 코, 입, 냄새, 발가락, 머리카락......

 

 

2010년 6월 11일 금요일

그냥

2010년 6월 9일 수요일

창문/ 사표/ 형식 합리성

* 누구의 것도 아닌 창문, 창문의 것도 아닌 구름....기형도의 창문은 아무도 비추지 않는다. 흩어져나가는 구름이 잠시 비출 뿐이다. 기형도의 창문은 너무나 투명해서 창문 앞에 선 자를 비추지도 아니하고, 세계를 열어보여주지도 않는다. 기형도의 창문이 보여주는 것은 거기 못박혀 죽을 운명을 감당하는 주체를 보여줄 뿐이다.

 

* 선거에서 '사표'라는 용어가 보여주는 것은 명확하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배반하는 근거가 대의제 민주주의 선거의 정치 공학에  지나지 않는다면, 결국 형식 합리성이 주체의 윤리를 압살해도 된다는 뜻이나 다름 없다. 절차적 합리성이 지켜지면 내용의 합리성이 보장된다는 무의식적 전제들, 기계적 균형, 윤리를 압도하는 형식, 사라지는 주체....형식 합리성에 대한 맹목은 '직접' 민주주의조차도 그 형식의 우월을 통해 평가하는 방식으로 변형된다. 이때 직접 민주주의의 '직접성'은 정치 주체의 자기 동일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형식 그 자체의 직접성이다. 아마 궁극적으로 그것은 '직접 민주주의'가 아니라, '직접주의(?)' 가 될 것이다.

2010년 6월 6일 일요일

어렴풋이

* 머릿속에서 쿵쾅거리는 심장, 두통, 어질머리, 신열 같은 거. 어딘가에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가 욱씬 거리며 남아 있는 통증 같은 거. 그 통증을 먹고, 통증 위로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는 문장들.....내 위로 급행열차가 지나갔다.....한 밤 중에 멍청하게 일어나 물마시고, 참외 깎아 먹고, 만화책 들여다보다가 노트를 만져본다. 다 식었다.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내 위로 급행열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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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6일 일요일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 요즘 이연주의 시집을 매일 매일 갉아먹고 있다. 새벽 두시. 나는 노오란 핸드 랜턴 불빛에 의지해서 이연주를 읽어 내려간다. 위악이라고? 실천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시도를 그렇게 부르는 건 '이미지'가 작동하지 않는 세계가 존재할 때 가능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미지는 작동하잖아? 어떻게? 단절을 매개로! 못박음을 시작으로!! 매음녀의 이미지는 히스테리증자가 시도하는 인식론적 단절의 시도다. 매음녀의 이미지를 불러내는 주체는 히스테리적 망치질을 시도하는 것이다.

 히스테리 주체는 기본적으로 타자의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에 실패한, 그래서 타자의 질서를 끊임없이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주체다. 그래서 그는 그 의심에 사로잡히기 전에 더 강력한 타자의 질서를 요청한다. 그는 타자의 욕망을 강화하고, 그 스스로 그 욕망에 합당한 대상이 됨으로써 이를 추인받고자 하는 주체다. 매음녀의 이미지는 이와 같은 히스테리 주체의 구조와 닮아 있다. 그러나 히스테리 주체는 매음녀의 이미지를 통해 스스로를 불러내지만, 실천의 영역까지는 갈 수 없다. 왜냐하면, 돈으로 교환되는 매음녀는 결정적으로 '교환불가능성'이라는 히스테리 주체의 존재론적 질문, 그 강박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히스테리 주체의 탄생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존재가 주체에게 묻는 '교환가능/ 불가능'의 질문의 반복과 강박일 것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많은 질서들이 '자본주의 전략'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히스테리 주체는 상징적 차원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일 수도, 또 가장 非자본주의적인 예외적 존재일 수도 있는 주체다.....

2010년 12월 21일 화요일

구체적 구체적

* 블로그가 자동으로 이전되었다.  겨울이다. 내 머릿 속에는 단백질로 만든 폭탄이 들어 있다. 당분간은 좀 과장 같더라도 그런 생각으로 살아야겠다.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임석진 선생, 아니 헤겔의 '정신 현상학', 레닌 평전2, 최재희 선생 번역의 순수이성 비판과 백종현 선생 역의 실천이성 비판....내가 연말에 아마도 사들이게 될 책들이다. 아 젠장 헤겔은 언젠가는 보게 될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냥 안보고 넘어갔으면 하는 책이기도 했다.

1. 제임스 낙트웨이라는 전쟁 사진가의 다큐를 본다. 전쟁 사진가....아니, 그냥 그도 전쟁의 일부이다. 전쟁의 모든 것이 악하지는 않다. 모든 전쟁은 악하지만, 전쟁의 모든 것이 악하지는 않다. 어쩌면 우리가 전쟁을 결코 없앨 수 없다면, 되도록이면 가장 덜 고통스러운, 덜 악한 전쟁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인지도 모른다. 나는 차가운 낙관주의자라는 생각이 든다.

2. 그러나 나는 영원을 목격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전쟁을 결코 없앨 수 없다는 말은 나의 도피처에 가깝다. 논증할 수 없는 말이며, 사실이 아니라 가치 판단에 불과하다. 나에게 구체적이라는 말은 그래서 논증할 수 없는 영원에 대항하는 유일한 무기일 것이다. 예술이 지향해야 할 방법이 있다면 오로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명제 뿐이다. 구체적인 모든 것은 언뜻 재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재현은 영원에 복무하기 위한 강박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것은 한번도 재현적이었던 적이 없다.

2010년 12월 19일 일요일

테스트

졸리네

자유냐, 목숨이냐

* 자유냐, 목숨이냐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는 질문에는 자유와 목숨, 두 가지가 다 가능한, 이를테면 공통분모를 제거한다는 전제가 은폐되어 있다. 자유를 선택하면 목숨이 없는데, 목숨이 없는 자유는 불가능한 것이니까... 그런데, 그 은폐된 공통분모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는 중요한 문제다. 그 공통분모가 자유냐 목숨이냐의 이분법 내부의 교집합에 해당되는 것인지, 아니면 자유냐 목숨이냐라는 질문 전체의 바깥, 그 예외적 존재로 볼 것인지는 사유 전체의 중요한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은 저 중요한 갈림길의 존재를 나한테 알려준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는 저 두 길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한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이해한 라캉은 그렇다. 그는 타인의 모순을 지적할 때는 그들의 이분법 내부의 교집합과 그 어두운 단면인 섹터주의를 비판하지만, 그러나 실재의 도래가 저 예외적 존재로부터 오는 것인지, 은폐된 교집합의 장에서 일어나는 돌발인지를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공부가 부족한 것이기도 하겟지만...

 

 내가 들뢰즈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이유는 저 갈림길의 존재가 선명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보신당과 민노당이 다시 합당 논의에 들어갈 것 같다. 합당까지는 아니더라도 연합. 좌파들은 저 둘 내부의 은폐된 공통분모, 혹은 폐쇄된 섹터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들 바깥의 돌발적 예외가 될 것인가.....여기까지가 금요일 밤 문득 내가 생각한 내용이다. 친구와 친구의 애인과 그 애인의 친구들과 어쩌다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친구 애인 왈 친구 가운데 A양과 B양 중 누가 더 이쁘냐는 거다.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나는 순식간에 생각이 내달렸다. 브레이크를 잃어버린 기관차처럼 자유냐, 목숨이냐부터 진보신당의 좌파들 생각까지. 피곤하면 생각이 내달린다. 머 한 마디도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 전두엽 장애인가, 싶었다.

 

* 아니 시발 그럼 통닭 배달하는 애들은 무슨 유령이냐구. 치킨 전쟁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의 전부다.

2010년 12월 16일 목요일

또 눈왔다

* 또 눈이 왔다. 이번에는 후둑후둑 함박눈. 날이 추워서 아침에는 잠깐 길에 쌓여 있다 녹았다가, 지금 다시 눈온다. 눈이 오면 나는 생각한다. 아니 생각이 저 혼자 선명하다. 내가 생각을 통해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조바심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눈온다. 당신 생각이 저 혼자 또렷하다.

 

* 들었던 노래를 또 듣기도 한다.

 

2010년 12월 15일 수요일

구름

* 자연이 좋다, 숲이 좋다, 그런 이야기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숲도 좋고, 나무도, 풀도, 꽃도 좋다. 그런데, 우리가 숲을 좋아하는 이유가 숲과 나무가 측정할 수 없는 신비를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사실에는 반대한다. 내가 겪은 숲, 내가 숲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발성이 그곳을 지배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 숲에서 우발성에 대해 관대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우발적이고, 가시적인 현상은 구름이다. 모였다가 흩어지는 동안 구름은 그야말로 원형을 가지지 않는 '현상' 그 자체다. 나는 '나'라는 우발적인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기를 원한다. 대부분의 '나'는 일종의 기시감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발견이지만 구름이야말로 그 발견의 바깥을 보여준다.....'나'라는 관성은 원형을 가졌다는 환상이 없다면 그져 일종의 접촉점에 지나지 않는다. 구름은 흩어지는 동안에도, 다시 모여 구성되는 동안에도 구름으로 호명된다. 감각적 실존의 차원은 우발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거다.

 

 .....그건 그거구. 나는 알고 보면 감정이 잘 일어나지 않는 타입이다. 냉정한 건 아닌데, 감정의 계기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사실 감정이라는 건 일정한 계기 그 자체가 불러오는 게 아니라, 그 계기들이 어떤 저항을 통과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나한테는 그 저항이 없다. '나'라는 기시감 같은 게 잘 없는 거다. 그런데, '나'의 구성은 다른 이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므로....즉 그 기시감의 정체는 타인들이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으므로....근데, 이 기사감을 깨뜨리는 존재가 나타나면 '나'는 비로소 저항을 통과하는 것이다.  

 

* 이택광 아저씨로부터 촉발된(?) 라캉주의 논쟁(?)을 보고 있자니 이건 뭐...지나치게 한심하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논쟁 주위로 모여드는 수많은 이상한 사람들의 논란보다 중요한 건 이택광 아저씨가 블로그에 언젠가 밝힌 바 있는 '글쓰기의 쾌락'(?)의 문제가 더 중요하지, 싶다. 비평의 욕망, 좌표, 지향.....더 이상 계몽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대중적 글쓰기의 장에서 어떤 글쓰기를 지향해야 할지, 그가 나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렇고 에라이...

2010년 12월 14일 화요일

크리스마스에 대하여

* 다시 한번 말하는데, 나는 12월 26인가? 입대했었다. 아무튼 그래서 나의 제대날짜는 2월. 복무기간은 26개월이었다. 그치만 크리스마스는 나의 제대를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므로 군복무 말기에 나는 지상의 모든 크리스마스 캐롤을 듣는데 시간을 투자했다. 제대 6개월 정도를 앞두고 내가 소속된 부대는 동해안에 철책을 다시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업장에서 돌아오는 내내 나는 분대원들에게 그날의 크리스마스 캐롤 합창을 시켰다. 왜냐하면, 나의 크리스마스는 나의 제대를 위한 상징적인 사건이었고, 나는 분대장이었으니까.

  아무튼 나의 크리스마스 캐롤에는 차가운 바닷바람과 작업장에서 돌아오는 젊은 군인들의 노랫소리와 해 떨어지는 해안선의 가파른 풍광이 들어 있다.

 

2010년 12월 9일 목요일

퇴근길의 호로비츠

* 적당히 추웠다. 퇴근 길에 호로비츠를 듣는다. 퇴근길에 듣는 음악들은 내가 사실 얼마나 허약한 욕망을 가졌는지, 스스로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날이 적당히 춥고 호로비츠를 듣고 있으니 머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원하는 것이 별로 없다. 나는 예외자로, 혹은 이방인으로 머무는 시간들이 가장 온전하다. 내가 글쓰기를 쉽게 그만둘 수 있었던 것도, 또 쉽게 직장 생활을 시작한 것도, 또 그것과 결별하는 일에 별로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요컨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한정된 자유 안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예외자를 손쉽게 정의하자면 뭐 그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10년 12월 7일 화요일

눈온다

* 헤겔 철학은 잘 모르지만, 그를 씹어 삼켜본 적은 없어도 길고 긴 혓바닥으로 햝아본 적은 있으므로...헤겔주의자에게 '예외적 주체'라는 게 있을 리 만무하다. 쿵짝쿵짝. 눈이 온다. 헤겔에게 세계를 정의내리는 일자는 존재할지 몰라도, 수많은 다양한 재정의와 해석이 가능한 '예외적 존재'가 가능할 리가 없다.

 

* 헤겔 월드에는 종교나 초월적 일자는 존재할 수 있지만, 예수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헤겔의 일자는 세계 내로 도래할 수 없다. 세계와 일자 사이에 인간은 그 둘을 매개하는 유한한 현상일 것이다. 예수와 같은 매개가 필요도 없고, 또 그에 의한 일종의 재해석이 필요하지도 않다는 거다.

 

* 헤겔은 안녕, 눈이 온다. 늦게 일어났는데, 눈이 무지 많이 올 거라는 기상 예보로 인해 도로에 차가 없고, 택시는 씽씽. 지각은 했지만, 굉장히 빨리 회사에 도착했다. 새벽에 잠깐 깨었는데, 눈이 안왔더랬다. 담배 피우면서 최승자 시인 생각을 잠시 했다. 좋아하긴 하지만 머랄까 다르다. 어떤 시들은 좌표만 겨우 가늠될 뿐, 감각적으로 나와는 멀리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가깝다고 더 좋은 시라는 건 아니고.....최승자에게는 자신의 세계가 있지만, 어떤 섹터가...없다...섹터라는 게 나쁜 뜻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친밀한 세계이고, 또 한편으로 눈 먼 내가 머무는 세계, 만지지 않고는 알 수 없고, 만질 수밖에 없는 세계. 그래서 답답하기도 하고, 강박이 아니지만 떼어낼 수도 없는 뭐 그런 거 말이다.

 

* 음. 원래 섹터의 지식인들은 머리가 짧아야 옳다. 빡빡 밀었다.

 

 

2010년 12월 5일 일요일

금지와 소외

* 그러므로 소외는 '금지'안으로 편입하기 위한 절차라는 거다. 통과의례라는 말이라고 해도 크게 잘못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금지라고 해서, 금기나 통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금지'는 타자가 이루어놓은 질서, 체계의 전체를 지칭하는 상징적 용어라고 해야 맞다. 타자의 질서 전체를 '금지'라는 말로 굳이 대표하고자 하는 이유는 뭘까. 금지가 미끄러지는 질서의 연쇄를 못박아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고정되지 못한 체계는 미끄러진다.

 

 뭐 이를테면 '남자'라는 시니피앙이 지시하는 것이 고정돼 있지 않다고 가정해보자. '남자'가 다리미를 지시하거나, 남자가 벽돌을 뜻하거나, 고양이를 뜻할 수도 있다. 그와 같은  체계는 '의미화'가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렵다. 의미화가 불가능하면? 자아의 생성 같은 일은 없는 거다. '의미'라는 건 별 것이 아니다. 자아는 저 질서, 그러니까 타자들의 체계에 편입되어 생기는 일종의 피드백과 같은 현상이다. 자아 역시 타자들의 체계에 소속되어 체계 전반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 받기도 한다. 요컨대, 우리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만큼 이 '피드백'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반대로 감정의 탈락, 배제 만큼 이 '피드백'의 접촉불량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그렇다면 당신이 저 질서의 체계 안으로 편입하는 데 어려움이 있거나, 실패하였다면 어떤 전략을 선택하게 될까. 그 한가지는 자발적 소외이고, 그 두번째는 일종의 히스테리적 자아의 소환이다. 그 두가지는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뭐 사실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떤 이유에서 당신이 저  질서의 체계 안에 초대받지 못했다면, 당신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소외'의 절차를 다시 한번 거쳐 '질서' 안에 편입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저 '질서의 체계'-'금지'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일 것이다.

 

 '소외'를 스스로 다시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자발적 소외'라면, 저 질서의 체계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히스테리..다. 자발적 소외는 자신의 미성숙한 '자아'를 배제함으로써 오디푸스 컴플렉스 안에 포함된 소외의 절차를 흉내내는 일이다. 스스로의 감정을 의심, 회의하고 이를 오로지 질서의 체계 안에서만 검증가능한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소통을 일방통행으로 만드는 것이 이 '자발적 소외'의 방식이기 쉽다. 그러므로, 자발적 소외의 주체는 질서의 체계를 향해 호소하는 일 없이, 저 질서의 체계가 자신에게 호소하는 일만을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수동성'으로 무장한 주체다.

 

 또 히스테리...는 ' 질서의 체계-금지'를 강화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단순히 더 강한 금지를 자신에게 부과하는 것만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강화하는 것, 즉 타자의 욕망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타자에게 호소력있는 대상이 되고자 하는 것이 히스테리 주체다. 결국, 히스테리 주체는 자발적 소외의 절차와 밀착해 있는 거다. 헥헥헥.

 

 첨언하자면, 그러므로 히스테리증자에게 미끄러지는 언어들의 축제인 시는 아주 혐오-배제의 대상이면서, 또 한편 자신의 미끄러지기 쉬운 세계, 그 불안을 들여다보고, 대면하게 만드는 언어일지 모른다.

 

 또 첨언하자면, 왜 자본주의적 주체, 혹은 근대적 주체가 자발적 소외와, 히스테리의 절차를 반복하는지 뭐 대략.

 

 

2010년 12월 3일 금요일

차이, 들뢰즈, 초월, 타나토스..

* 라캉 다음에는 알튀세를 읽으려고 했는데, 들뢰즈부터 읽기 시작했다. 아니, 들뢰즈 입문서부터....근데, 들뢰즈의 말처럼 초월이든, 팔루스든 머 물론 라캉도 이에 대한 회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들뢰즈의 말처럼 일원론이 없다면, 타나토스도 없다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그러니까 차이의 체계가 일원론을 형성한다는 해석보다는, 실재, 타나토스 머 이런 것이 일원론을 형성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 구태의연한가. 음...나는 라캉의 '실재'가 일원론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 그리고 호로위츠의 라흐마니노프 듣고 있는데, 참 좋구나.

 

*

 

2010년 11월 30일 화요일

전쟁, 전쟁, 전쟁

* 그건 전쟁이라서, 현실의 정치적 함의 같은 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쟁이겠지.

 

* 글을 쓰는 건 좋은데, 그냥 몽롱하니 받아적고 싶다. 내가 원하는 글쓰기의 원형이 그런 것인데, 그곳으로 가기가 쉽지가 않다. 몽롱해도 할 건 다 한다. 저항도 하고, 도약도 하고, 두드리기도 하고.

2010년 11월 17일 수요일

자발적 소외 / 계급의식이라는 환상 - 한밤중 수정- 두번째

* 원래 소외는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다. 혹은 근대적 주체가 태어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기도 하지만.....주체는 기투된 존재인 이상 주어진 질서, 즉 타자의 장에서 구성되고 정의될 수밖에 없다. 또 그와 같은 소외의 과정 없이는 어떠한 자기 확인의 절차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의 물화와 상품의 물신화는 역사적으로는 근대화의 과정으로 옮아가는 중요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 인간의 사회화가 진행되는 보편적인 과정으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기도 하다. 인간은 사회적 질서 안에서 자신의 전존재와 항상 조우하면서 살 수 없다. 그가 사회적으로 조우하기 위해서는 존재가 결여된 주체로써, 소외의 절차를 통해 자아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질서에 복무하고, 갈등하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물론 들뢰즈는 저 결여를, 존재를 위한 장치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없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기 위한 장치 말이다. 들뢰즈 공부는 모자라서 여기까지..)

 

 그러니까 소외는 존재론적 의미에서 주체가 타자의 질서에 소속되기 위한 절차인 셈이다. 우리가 흔히 '자아 실현'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존재의 실현'이 될 수 없다는 소외의 차원과, 보편적 사회화를 표현하는 적확한 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결정적으로 소외는 주체가 소외를 통해 만나는 질서 너머의 무엇과 조우하기 위한 대책없는 열망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소외의 과정, 존재에서 자아로의 전환 과정은 비자발적 절차, 혹은 언어적 질서에 의해 강제된다고 보아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은 '강제'가 결핍되거나, 훼손되면 당연히 주체는 '비자발적 소외'의 과정 대신 '자발적 소외'의 절차를 불러들이게 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바로 이와 같은 비자발적 소외, 언어적 질서로의 편입을 위한 강제의 과정이다. 어머니로부터의 분리, 그리고 금지를 통해 '주체'로부터의 소외를 통해 탄생하는 '자아'로의 전환 과정에는 '소외가 어떻게 상징 질서 안으로 '나'를 불러들이게 되는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회화된 자아를 형성하는 데 실패하는 이유는 두 가지 정도다. 분리의 실패 혹은, 소외의 실패...분리의 실패는 내가 곧 팔루스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소외의 실패는 타자의 장, 타자의 욕망을 강화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진다.

 

 자발적 소외는 그러므로, 타자의 욕망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아니, 반대로 타자의 욕망을 강화시키려 드는 히스테리증자, 강박증자는 자발적 소외의 메커니즘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최후에 스스로 눈을 멀게 한 것처럼 그도 스스로의 눈을 멀게 할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 소외는 저 왕의 비극처럼 언제나 뒤늦은 것이 될 뿐이다. 자신의 눈을 멀게 하지 않고는 언어적 질서, 사회적 강제 안으로 편입될 수 없는 주체가 바로 자발적 소외의 주체이다. 오이디푸스 왕의 신화에 등장하는 예언자 테레시아스가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주류 질서에 속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이미 장님이기 때문이다. 

 

 자발적 소외에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자발적 소외를 통해 강화되는 타자의 욕망이 '진리'라는 이름으로 표현된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진실, 혹은 진리를 압박하고 뒤흔드는 허구, 부정의 힘을 믿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 나는 적어도 87년 체제 안에서 계급 문제는 최전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87년체제는 계급문제의 종식 혹은, 계급의식을 환상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  체제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87년 체제를 통해 대표적으로 노동자 대투쟁은 물론, 전노협, 민노총 등 노동운동이 지속된 것만은 사실이다. 비록 그 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나, 산별노조 전환 등 중요한 이슈 등을 선점하는 데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성과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87년 체제는 민주 대 반민주, 혹은 민주 대 파쇼, 혹은 진보 대 보수의 이분법으로 통칭할 수 있고, 그와 같은 통칭이 적합한 체제이며, 그 이유는 87년 체제에는 결정적으로 계급문제가 배제되어있거나, 혹은 계급문제가 오로지 환타지로써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87년 체제가 지향하는 민주화란 일방적 폭력이 아닌, 합의된 권력을 통해 지배-피지배를 실현하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쓰다보니 이건 뭐, 너무나 폭력적인 단순화가 되어버렸지만, 이들이 가진 시장에 대한 맹신이야말로 그 내용과 상관없이, 합의된 권력-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이들의 강박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소위 세대론이 사회적 이슈로 불거질 때마다 이들 민주화 세대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이들에게 계급의식이란, 정체성의 확인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계급의식이라는 환상이 창궐하는 이유는 합의된 권력이 존재하기 이전, 그러니까 일방적이고 노골적인 폭력이 지배-피지배를 완전히 장악하던 시대로부터 벗어났다는 자기 확인의 반복임과 동시에, 시장에 잠식당한 자신의 계급적 자각을 마비시키는 장치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허용할 수 있는 계급의식이란 품성이나 인격, 사회적 지위, 가족, 국가, 도덕이라는 이름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공존이 가능하거나, 더 나아가 도덕, 가족, 국가의 가치를 강화시키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의 20대들이야말로, 저 87년체제의 '계급의식이라는 환상'을 폭로할 주체들이라고 생각한다. 87년 체제가 20대들을 자신들의 상징 질서로부터 자꾸 배제하려고 드는 이유는 20대들이 87년 체제 내부로 투항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목격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터무니없는 생각이고, 또 안타깝지만 나는 세대론으로 일컬어지는 담론 영역이 지금 20대들이 참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장이 아닌가, 싶다. 세대론의 등장 이후 내가 그곳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가 이것이었던 것 같다....

 

 

 

 

 

2010년 11월 11일 목요일

논리적 시간

* 통시적/ 공시적 관점의 구분은 시간의 자연적 흐름으로 사건을 서술하고, 내러티브를 구성하느냐, 아니면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인과와 논리에 따라 이를 구성하느냐의 차이를 통해 이루어진다. 반면, 논리적 시간은 통시적으로 확정된 내러티브를 일정한 지향을 가진 논리와 인과를 통해 재구성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논리적 시간은 공시적으로 재구성된 내러티브를 마치 '통시적 관점'인 양 묘사하고 표현한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이를테면 출고된지 며칠 안된 신형아반떼가 갑자기 발화돼 불에 타버린 뉴스를 예로 들어보자. 사건 운전자의 가족이 이 이야기를 인터넷에 퍼뜨려 많은 이들이 해당 사건을 알게 되었는데, 통시적 시간은 발화 사건이 먼저이고, 인터넷에 소식을 전한 것이 그 이후이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논리적 시간에 이 운전자가 매몰되었다고 가정하자. 운전자는 가족이 인터넷에 루머를 만드는 잘못된 습관 때문에, 차에 발화가 되었다는 식으로 이 사건을 구성하고 묘사한다. 그리고 가족을 비난한다.

 

  여기에는 분명한 '지향'이 있다. 그리고, 이 지향은 대개 통시적 관점을 비틀어줌으로써 내러티브의 '공시적 관점' 즉 논리와 인과를 완전히 휘발시키려는 의도를 가진다. 위에 만든 이야기는 극단적인 예이지만, 우리는 사실 아주 많은 경우에 이와 같은 '논리적 시간'을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살아내고 있다. 위 이야기의 지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와 같은 '논리적 시간'으로 재구성된 내러티브의 수혜자가 누군지를 잘 알 수 있다. 신형아반떼를 만든 회사일 것이다. 또 운전자는 가족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만들어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명확한 결론이 보이지만 그러나 실제로 '논리적 시간'이 보여주는 지향은 매우 이해하기 어렵고, 그 지향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파악하기는 더 어렵다.

 

*

2010년 11월 6일 토요일

회복기

 * 꿈이란 꿈에 죄다 옛날 사람들이 나온다. 전두엽에 뇌출혈로 손상된 뇌신경을 포기하고 새로운 통로를 만드느라 그런 것이란다. 창고로 가는 새로운 길을 만드느라 뚝딱뚝딱 전두엽이 바쁜 거다. 잠만 자면 온갖 옛날 사람들이 나와서 시끄럽기는 또 왜 그렇게 시끄러운지. 끙.

 

* 이것두 손상된 전두엽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자유주의야말로 전위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전위라는 건 무엇일까. 나는 그곳이 최첨단이기전에 인간의 내장을 환하게 보여주는 최전선이라고 생각한다. 계급의식은 인간의 내장이 아니라, 내장을 들여다보거나, 혹은 뒤집어 꺼내 쏟아놓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스탕달이나, 파스칼 같은 이들의 글은 항상 나에게 경탄과 풀 수 없는 의심의 대상이었는데...../ 코기토가 아니라, 욕망이라는 테제에 이끌려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 마음의 역동성, 불안의 반복을 설명할 때 '방어'라는 말 대신 '저항'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백번 옳다. 저항은 전이와 쾌락, 괴로움을 한꺼번에 담아낸다.

 

* 내가 정말 사랑해 마지 않는 박광현

 

 

2010년 10월 12일 화요일

사회생활의 끝

* 알콜알러지로 1년, 그리고 어느날 가을 술을 먹고 뇌진탕...전두엽을 다쳤다.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고....몸이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이렇게 이제 그만 사회 생활이 끝났다는 생각이 든다. 또 돈이야 벌어야겠지만, 다른 일을 해야 할 상황이다. 서른일곱까지 아무 일없이 사회 생활을 해왔다는 것 자체가 더 신기하다. 무슨 일을 하게 될까, 싶긴한데 내년쯤이나 되어야 새로운 생황을 찾아낼 것이다.

 

* 도무지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잊을 수가 없다. 10년이나 잊어버리고 살려고 노력했는데 결론은 잊을 수가 없다는 거. 내가 가진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감각은 글쓰기에 대한 것 뿐이더라. 열일곱에 처음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고, 스무 해가 지났다. 아마도 글쓰기야 말로 나에게 진짜 이름을 정해주는 일이 될 것이다. 진짜 이름? 나를 폭로할 이름 말이지...

 

* 왓비컴즈가 보여주는 것은 한 가지인데, 오리지널이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언제든지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유저들이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리지널이 존재하고, 그것에 대한 해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의 정보 자체는 오리지널을 갖고 있지 않은 데이터 그 자체다. 그러므로 정보는 원형으로 돌아가거나 회귀하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 스스로 구성되면서 오리지널 존재 유무와 아무런 상관없는 세계를 만들어 보여준다.

 

 타블로가 스탠포드를 나왔냐,의 사실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학력'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대한 유저들의 새로운 환타지이다. 대한민국의 학력, 인맥의 힘에 대한 불신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인터넷 정보들이 이것과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정보의 연쇄 작용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타블로의 학력은 무슨 종교인의 자기 존재 증명 같은 과정을 통해서 겨우, 얻어졌다. 그가 졸업했는지에 대한 사실 여부보다 중요하게 작동한 것은, 그가 자신의 학력을 증명하는데, 완전히 우파적인 방법 이외의 것이 통용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 진짜 신기해. 인터넷은 자기 주술의 동어반복 속으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오리지널의 존재를 완전히 뭉개 버리는 새로운 정보 체계로 탈바꿈하고 있다.

 

* 나얼의 귀로

 

2010년 9월 24일 금요일

빗속에서

 

* 수퍼스타케이에서 존박이라는 미쿡청년이 이문세 노래를 부른다. 내가 좋아하는 빗속에서......

 

* 증상은 이미 무의식에 대한 해석이다. 전이는 분석주체의 무의식을 닫는 행위에 가깝다. 전이는 저항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무의식과 전이 사이의 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증상이 언어로 번역될 수 있을리 없다. 전이-저항이야말로 유일한 통로다. 반대로 말하면, 저항없는 전이, 가짜 전이는 주체의 의태에 불과하다.

2010년 9월 19일 일요일

라캉, 병, 졸고 있는 분석가

* 세미나 11을 다시 읽고 있다. 화장실에 갈때 들고 가서, 접힌 페이지를 다시 읽고 생각하고, 감탄하고.....내 알콜 알러지는 내 몸의 질서와 더불어 살기를 거부한 어떤 것일텐데...이것을 내 몸 바깥으로 완전히 몰아내고, 죽이고, 다시는 그 증상들이 틈입하지 않도록 내 몸을 단단히 무장하는 방법이 있을테고....아니면, 그것들과 더불어 살 수 있도록 적절하게 타협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건강이란 건 어떤 병도 침입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과 적절하게 더불어 살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더군다나, 후자의 방법은 증상과 증상 아닌 것의 경계, 분리의 정책을 돌아보게 만들어 줄 것이다...

 

* 분석 주체가 편안하게 자신의 언어를 풀어놓을 수 있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분석가' 야말로 전이의 단계를 넘어 존재하는 분석가의 모습이 아닐까.

 

* 라캉이 시각적인 것에 대해 가지는 생각들은 매우 매혹적이고, 또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것들과 아주 의심할 여지 없이, 닮아있다. 메를로 퐁티를 한번도 읽어본 적은 없는데, 읽어봐야겠다. 그런데, 라캉이 성경에 등장하는 사악한 눈, 혹은 비정한(?) 눈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전적으로 성경에 있어 '시각 적인 것'은 '로고스' 즉 헬레니즘 전통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시각이야말로 보편적 왜곡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장이라는 뜻일까.

2010년 9월 15일 수요일

점멸

* 길게 보면 나라는 현상(미야자와 겐지 식으로)은 그냥 작은 점멸에 불과하다. 멀리서 깜빡이는 불빛에 불과하고, 자체적으로도 실은 불연속적이고, 일관성 없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글쓰기는 그 낙차와 틈을 메우는 행위일까. 아니면, 그 낙차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깜깜한 틈을 들여다보는 일일까. 라캉의 '응시'가 말해주는 것은 나의 일관성, 자기 동일성은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마련된 장, 안에서만 유지된다는 것이다.  

2010년 9월 9일 목요일

세상에는 재밌는 게 너무 많네.

* 수요일마다 농구를 하는데, 오랫만에 미친듯이 달리니까 재밌다. 음 화요일까지 대략 87, 86 근처를 왔다갔다하는 체중이 수요일을 기점으로 84, 85를 왔다갔다 한다. 너무 오랫만의 농구라서 아직 심장과 관절이 적응이 덜 됐는지 비명을 지르는데, 것두 맘에 든다. 요즘은 또 술을 못먹으니까 딱 한잔, 딱 두잔 이렇게 먹는 경우가 많은데 술은 또 왤케 맛있나. 악. 그리고, office 라는 미드를 시즌 5까지 봤다. 어제는 운동하고, 새벽 5시까지 내리 시리즈를 보다가 두 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스타크에 다시 빠져서 주말에는 새벽까지 스타크 한 10번쯤 하면 한두번 이기는 정도 밖에 안되지만......데니스 루헤인의 탐정소설들로 여름을 다 보냈고, 요즘은 캘리니코스 아저씨 책들을 읽는 중. '반자본주의적이지만 노동계급에 친화적이지 않은' 생각들과 좌파들이 왜, 어떤 방식으로 화해할 수 없는지를 몸소 보여주신다. 가끔 캘리니코스 아저씨는 자본주의적, 아니 산업주의적 효율성과 합리성에는 친화적이지만, 소위 말하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데...흠....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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